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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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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 즐거운 편지 / 황동규1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 * * *눈내리는 날은 어김없이 생각나는 시가 이 '즐거운 편지'다오늘 눈발 날리는 길을 걸으며 이 시를 떠올렸다
그윽한 향기 그윽한 향기 / 서성환칼이 춤추는 섬뜩한 시대배신이 일상인 분주함 속에 승리의 노래도 패배의 노래도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함께 스러져가는 너와 나슬픔과 상처와 우울과 어둠이어지럽게 엉킨 한限의 노래가끝없이 징징대는 가슴들 속에숨살이 꽃으로 피어나는 다향모두를 살리고 보듬어 안는데있는 듯 없는 듯 보일 듯 말 듯거기 그렇게 모두의 곁에 있어누군가 따뜻한 미소들 사이에서그 마음과 그 마음이 이어져서 서로를 용납하게 하는 그윽한 향기
병상일기 3 / 이해인 병상 일기 3 이 해 인 사람들이 무심코 주고받는 길 위에서의 이야기들 맛있다고 감탄하며 나누어 먹는 음식들 그들에겐 당연한데 나에겐 딴 세상 일 같네 누구누구를 만나고 어디어디를 가고 무엇무엇을 해야지 열심히 계획표를 짜는 모습도 낯설기만 하네 얼마간 먼 곳에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며 전화를 거는 친구의 목소리도 그리 반갑지가 않고 밑도 끝도 없이 야속한 생각이 드니 이를 어쩌지? 아프고 나서 문득 낯설어진 세상에 새롭게 발을 들여놓고 마음을 넓히는 일이 사랑의 의무임을 다시 배우네 ***** 아픈 친구가 이 시를 읽고 수녀님이 자기 일기장을 몰래 훔쳐본 줄 알았다고... 그만큼 공감이 된다는 말이겠지 아픈 사람 앞에서는 일상적인 이야기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푸른 밤 / 나희덕 푸른 밤 -나 희 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꽃잎 한 장처럼 꽃잎 한 장처럼                                                               이해인 살아갈수록나에겐 사람들이 어여쁘게 사랑으로 걸어오네아픈 삶의 무게를 등에 지고도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걸어오는그들의 얼굴을 때로는 선뜻 마주할 수 없어모르는 체 숨고 싶은 순간들이 있네늦은 봄날 무심히 지는 꽃잎 한 장의 무게로꽃잎 한 장의 기도로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오랫동안 알고 지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그들의 이름을 꽃잎으로 포개어나는 들고 가리라 천국에까지꽃사과의 꽃이우리가 먹는 사과의 꽃과똑같아 보인다.사과는 꽃 필 때 풍작인지흉작인지가 판가름 난다고 한다올해는 꽃 필 때 날씨가좋았으니 사과가 풍작일 거 같은데 그 말이 맞기를 기원해 본다
사랑에 답하다 사랑에 답하다 나태주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 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 *** 예수님의 아가페사랑을 말씀하시나요? 애로스사랑으로 시작했지만 아가페사랑으로 익어가라는 말씀인가요? 사랑 참 어렵네요
보내놓고 / 황금찬 보내놓고 / 황금찬 봄비 속에 너를 보낸다. 쑥순도 파아라니 비에 젖고 목매기송아지가 울며 오는데 멀리 돌아간 산 구빗길 못 올 길처럼 슬픔이 일고 산비 구름 속에 조으는 밤 길처럼 애달픈 꿈이 있었다. * * * 봄비 내리는 아침 손자 학교 보내놓고 여유를 즐기는 중에 시 한 편 올립니다 손자가 그만 따라오라고 해서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느새 저렇게 컸네요
봄길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