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 김기창의 데뷰작 <판상도무(널뛰기)>에 얽힌 이야기
나는 임용련의 <십자가의 상>을 발굴한 뒤에도, 꾸준히 미국의 경매사이트를 들락거렸다. 가짜거나 가치없는 그림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살폈다.
2005년 11월 말, 미국의 한 인터넷 경매사이트에 예쁜 그림이 하나 올라왔다. 미국인으로 추정되는 판매자가, 오래전 북한에서 구입한 작품인데 화가가 누군지 모르겠다며 출품했다. 북한에서 나왔다고 하는 작품 중에는 가짜가 너무 많아 판매자가 올린이미지를 자세히 살폈다. 물론 이미지는 그림의 색상과 상태를 정확히 아는 데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자주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김기창, <판상도무(널뛰기)>, 비단에 채색, 33×25cm, 1930년대 중반
왼쪽 아래에 운보 김기창(1913~2001) 화백이 광복 전에 쓰던 ‘운포(雲圃)’라는 호가 씌어 있고, 도장이 찍혀 있었다. 도장 부분을 확대했더니 ‘기창(基昶)’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운보의 그림은 미국 인터넷 경매에도 가끔 나오기 때문에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운보의 다른 그림에 비해 섬세하고 색상이 좋았다. 소녀들의 화려한 옷차림으로 볼 때 설날에 널뛰기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여겨본 부분은, 널판 가운데 쪼그려 앉은 열 살이 조금 넘어 보이는 소녀다. 허름한 차림으로 보아 아씨들의 몸종으로 보인다. 그렇게 앉아 있은 지가 오래되었는지, 추위를 이기려고 어깨와 손을 웅크렸다. 실감나는 표정 묘사로 인해 소녀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어린 시절 가난하게 자란 운보는 나이 어린 여동생들의 배고픔을 지켜봤기에 이 소녀의 안쓰러운 표정을 이토록 실감나게 묘사할 수 있었으리라.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마루의 나뭇결과 방문 그리고 소녀의 옷과 신발을 통해 화가의 숨소리와 붓질소리가 들릴 듯하다. 섬세한 붓질로 그려낸 치마 주름의 금색, 저고리의 고름과 문양, 꽃신의 옥색 제비부리…… 우리나라 근대미술 중 한복과 꽃신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잘 나타낸 작품이 있던가?
팔짱을 낀 채 널 뛰는 모습을 바라보는 소녀의 표정에서는 부잣집 규수의 도도함이 엿보이고, 뛰어오를 차례를 기다리며 입을 꽉 다문 채 오른손으로 치마를 움켜쥔 소녀의 모습에서는 현장감이 느껴진다.
이처럼 그림을 꼼꼼히 살펴본 후, 경제적으로 큰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입찰했다. 그런데 며칠 후 한국 사람으로 추정되는 사람에게서 영어 이메일이 왔다. 거의 모든 경매에서 그림을 내놓은 사람이나 입찰자가 공개되지 않는데, 미국의 일부 인터넷 경매는 입찰자가 판매자에게 이메일주소를 알려줘 구체적인 사항을 물어볼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하면 판매자와 구매자가 직거래를 해 경매회사의 수수료수입이 줄어들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림의 상태와 진위를 당사자들끼리 확인하게 함으로써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도 있다.
내가 받은 이메일은 경매에 나온 운보의 그림이 북한에서 만들어진 가짜라는 내용이었다. 미국에는 북한에서 들어온 가짜 그림을 전문적으로 유통하는 조직이 있어 자신도 크게 당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림을 살폈지만, 가짜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정교해서 메일을 무시했다.
일주일 후 경매가 마감되었지만, 결국 낙찰받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경매기록을 보니, 입찰 마감 5분 전부터 ‘대격돌’이 벌어졌고, 국내 시세의 세 배에 입찰한 사람에게 낙찰되었다. 과열경쟁이었다. 나와 인연이 없는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리려 노력하고 있는데, 지난번에 이메일을 보낸 사람이 메일을 보내왔다. 당신을 비롯해 바보가 너무 많다면서, 그림 위조업자가 돈을 챙기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어, 자신이 다음부터 이 경매에 입찰하지 못하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거짓입찰’을 했으니, 돈 굳은 줄 알고 앞으로는 절대 가짜 그림에 입찰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가짜 그림에 한이 맺혀도 단단히 맺힌 사람이었다.
인연이 있는 그림은 반드시 나를 찾아온다
판매대금이 입금되기를 기다리던 판매자는 결국 한 달 후에 다시 경매에 올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작가가 국내 시세보다 비쌌다. 가격 때문인지 아니면 이메일 때문인지 아무도 입찰을 하지 않았다. 이런 과정이 두 번 반복되자 판매자는 시작가를 낮췄다. 그 사이에 잘 아는 큐레이터로부터 “사진으로 볼 때는 진품 같다”는 답변을 받은 나는 자신있게 입찰했고, 경쟁자 없이 낙찰받았다.
이 그림을 통해 나는 그림에도 ‘인연’이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인연이 있으면 낙찰을 받지 못해도 결국에는 나에게 온다. 인연이 없으면 낙찰을 받아도 출품자가 팔지 않겠다고 마음을 바꾼다. 실제 그런 황당한 경우도 당해봤다.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연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화도 풀어졌다.
애호가의 길은 멀다. 작품 한 점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인연을 따라 물 흐르듯 그렇게 한 점 두 점 편안하게 모으는 게 좋다. 그림값이 오른다고 조급하게 사면 틀림없이 후회하게 된다. 투기하듯 사거나 경매에서 지나치게 경쟁을 해도 안 된다. 나에게 편안한 그림을 편안한 가격에 사겠다는 마음으로 임할 때 좋은 그림과 인연을 맺을 수 있다.
얼마 후 집으로 배달된 그림을 보니, 보존상태도 좋고 색상도 깨끗했다. 전에 임용련의 <십자가의 상>을 구입할 때 소장경위를 알아보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돼서, 이번에는 판매자에게 소장경위를 알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운보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도 깜짝 놀랄 흑백도판이 눈에 들어왔다.
왼쪽은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1931)’ 입선작의 흑백도판이다. 오광수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운보의 데뷔작인 이 입선작이 사진으로만 남아 있어, 원작의 색상과 디테일을 볼 수 없다고 아쉬워했다. 다시 한 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이기 때문에 소품일 가능성은 적었지만, 1931년에는 작은 그림도 출품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그림을 살펴봤다.
그러나 두 작품은 같은 그림이 아니었다. 흑백도판의 두 번째 소녀가 입은 옷의 소매를 보면 흰색인데, 내가 산 그림은 짙은 파랑이었다. 사진 찍는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파랑색은 흑백사진에서 어두운 회색으로 나온다고 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운보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최병식 경희대 교수의 『천연기념물이 된 바보』를 읽었다.
이 책에 따르면, 운보의 데뷔작 <판상도무>는 크기가 150호 (227×162cm) 정도의 대작이었다. 이 작품은 운보의 어머니가 간호사로 근무하던 세브란스병원의 치과 과장 부츠 박사가 100원(당시 서울시내 기와집 한 채가 1천 원 정도)에 사서 병원에 걸어놨는데, 6.25전쟁 때 어디론가 사라진 후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구입한 그림은 운보가 크게 그린 <판상도무>를 작게 베낀 위작이란 말인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 그림을 계속 살피고 있는데, 판매자로부터 소장경위와 함께 사진 이미지가 첨부된 메일이 왔다.
미국인 의학사 파온 송덕비. 왼쪽이 의사 파워, 가운데가 부인, 오른쪽이 딸 수전 파워다.
메일은 판매자의 며느리가 보냈는데 소장경위가 좀 복잡했다. 자신의 시어머니의 아버지인 파워 박사가 1910년 초부터 1935년까지 북한의 ‘호쿠친’이라는 곳의 광산에서 의사로 있을 때 구한 그림이라면서, 사진의 오른쪽 소녀가 바로 시어머니라고 했다.
사진을 보는 순간, 애매모호한 소장경위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우리나라 근대에 외국인 송덕비가 세워졌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래서 ‘호쿠친’이 도대체 어딘지 알아봤더니, ‘노다지(No touch)’라는 말을 탄생시킨 운산 금광이 있던 평안북도 북진이었다.
인터넷에서 북진을 검색했더니, 그곳 출신 유명인사 중 1970 ~80년대 ‘사상의 은사’로 불린 리영희 교수가 있었다. 그래서 오래전에 읽은 리영희 교수의 회고록 『역정―나의 청년시대』을 다시 읽어보니, 어린 리영희에게 회충약을 준 미국인 의사가 바로 파워 의사였다.
내가 1929년 12월 2일에 태어난 곳은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 (중략) 인생을 거슬러서 처음으로 떠오르는 기억은 세 살부터다. 아버지의 월급날, 통장 들고 우편소(우체국)로 가는 어머니의 손에 매달려 가다가 중국집에 들러 나의 손에 사 쥐어준 중국호떡의 맛! 한일합방 후 러시아에서 미국인의 손으로 넘어온 운산금광의 부속병원에서 파워(Power겠지)라는 키 크고 코 큰 누렁머리의 이상한 인간으로부터 억지로 입속에 부어넣어졌던 흰 회충약가루(산토닌)의 쓴 맛!
_ 리영희, 『역정―나의 청년시대』 p.11-12
운산금광 부속병원 간호사의 모습 (1920 ~ 1935 사이)
내가 혹시 북진의 병원 사진이나 마을 사진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메일을 보냈더니, 병원 사진을 비롯해 꽤 많은 사진을 보내주면서 셔우드 홀 선교사의 책에도 파워 박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알려줬다. 홀은 앞에서 엘리자베스 키스의 크리스마스 실 그림을 소개할 때 언급한 캐나다 의사다.
닥터 파워는 구세대 시골 의사의 인정미를 가진 현대판 의사였다. 광산마을 사람들이 왜 그를 좋아했는지 우리는 곧 알게 되었다. 그는 미국 사람이든 조선 사람이든 차별하지 않고 성심껏 진료했다. 환자들을 사랑했고 그들도 의사를 사랑했다. 이 유능한 의사가 병이 나서 진료를 계속할 수 없자 이곳에서는 좋은 미국인 의사를 구할 수 없었다. 그때에 우리가 도착하자 온 마을이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던 것이다.
_ 셔우드 홀, 김동열 옮김, 『닥터 홀의 조선회상』 p.447-448
운보가 그린 1937~38 크리마스 실과 엽서
홀 선교사는 파워 박사뿐 아니라 운보와도 인연이 있었다. 운보는 홀 선교사가 발행하던 크리스마스 실의 그림을 두 번이나 그려줬다.
그림에 얽힌 사연을 좇다 보니 그의 삶이 거기 있다
파워 의사에 대해 이쯤 밝혀졌으니, 운보의 그림이 가짜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운보의 그림을 어떻게 평안북도에서 구했는지가 궁금해서, 당시 소녀였던 할머니와 통화를 하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다. 마침내 며칠 후 할머니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놀랍게도 1925년 북진에서 태어났다. 고향이 한국인 미국 할머니다. 할머니는1939년 미국인들에 대한 추방명령이 떨어져 러시아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북진에서 살았고,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오랜 ‘한국회상’이 끝나기를 기다려, 파워 의사가 이 그림을 어떻게 소장하게 되었는지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그 그림은 서울의 치과의사인 부츠 박사가 1년에 두 번 금광으로 치과진료를 올 때 갖고 온 그림이고, 자신의 어머니가 ‘노래방’에서 구입했다고 했다. 내가 놀라 “노래방이라고요?” 하고 묻자, 할머니는 금광 사무실 근처에 휴게실(club)이 있었는데 주말이면 직원들이 그곳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해서 한국 사람들이 ‘노래방’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부츠 박사는 금광에 올 때 그림을 많이 갖고 와서 이 ‘노래방’에 진열해 놓고 직원들에게 팔았다고 한다.
왼쪽에서 세번째가 파워 의사 그 오른쪽이 부츠박사
부츠 박사는 운보가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는 치과의사로, 운보의 어머니인 한명윤(1894~1932)이 세브란스병원 치과에서 간호사로 일할 때부터 운보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줬고, 그녀가 죽은 후에도 운보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명윤은 진명여고를 1회로 졸업한 신여성이었지만, 두집살림을 하던 남편이 금광을 개발하면서 친정 재산까지 탕진해, 친정어머니와 함께 일곱 명의 자녀를 키우느라 온갖 고생을 다 했다. 특히 운보가 일곱 살 때부터 듣지 못하게 되자,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던 미국유학 기회를 포기했을 뿐 아니라 여학교 교사직까지 그만두고 월급이 좀더 많은 세브란스병원 치과 간호사로 일하면서 운보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훗날 운보가 필담으로 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어머니의 노력 덕분이었다.
한명윤은 아들이 이당 문하에 들어간 지 6개월(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첫 작품으로 <판상도무>를 완성하자 ‘운포’라는 호를 지어주었고, 운보는 이 호를 8.15 광복 때까지 사용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이 어엿한 화가가 되자, 그동안 제대로 돌보지 못한 건강이 갑자기 나빠져 1932년 10월 15일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도 흔적없이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운보는 열여덟 살에 외할머니와 함께 여섯 동생을 먹여살려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천연기념물이 된 바보』에 의하면, 운보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자, 세브란스병원의 부츠 박사는 <판상도무>를 병원에 걸어놓고 주문을 받았을 뿐 아니라, 친구 부인들의 동양화 지도를 알선해 주었다. 운보는 부츠 박사의 주문에 따라 작은 <판상도무>와 풍속적인 그림을 여러 점 그렸고, 박사는 그 그림들을 멀리 평안북도에까지 가서 팔아준 것이다.
당시 운보는 몹시 가난했기에, 아니 먹고사는 게 너무 절박했기에 같은 그림을 여러 장 그려서는 안 된다는 화가들의 불문율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훗날 박수근이 <빨래터>를 크기만 다르게 몇 점 그린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나는 운보가 그린 작은 <판상도무>를 볼 때마다, 말하지 못하는 아픔을 딛고 동생들을 먹여살리려고 발버둥쳤을 열여덟 살 운보의 모습이 떠오른다.
운보 관련 자료 -------------------------
24세 때인 제16회 '선전'(1937)에 할머니의 옛얘기를 듣는 아이들을 담은 [고담](古談)을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을 때 신문기사.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채 10년'이라는 제목이 마음을 저리게한다.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농아들을 위해 청음복지재단을 건립해서 많은 도움을 줬다.
2000년 12월 1일, 가난을 이기지 못해 6.25때 월북한 동생 김기만이 가족상봉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와, 거의 의식불명 상태인 운보와 눈물의 상봉을 했다. 하늘이 운보에게 내린 생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운보는, 2001년 1월 23일 눈을 감았다.)
당시 한겨레 신문은 이 장면을 이렇게 보도했다.
"..." "..." 병실은 고요했다. 눈물만 흘렀다.
50년만에 만나 `형님', `아우야'를 목청놓아 부르고 싶었지만 고령으로 쇠한 몸과 트이지 않는 말문에 운보 형제는 눈빛으로만 애닯은 정을 나눴다.
이마저도 기적같은 일이었다.
오후 3시20분께 숙소인 롯데월드호텔을 떠난 동생 김기만(71)씨가 5분만에 김기창(88) 화백이 입원중인 삼성서울병원 1902호실에 들어서는 순간 병상에 환자복 차림으로 누워있던 김 화백의 눈은 동그래졌고 벌어진 입은 닫히지 않았다.
전날까지만 해도 의식조차 불투명했던 운보지만 동생을 한눈에 알아봤다.
기만씨 마저 몸이 불편한데다 형님을 뵌 감동에 한마디 감탄사 조차 터지지 않았지만 두 손을 마주잡고 비벼대는 형제의 눈에서는 눈물이 이내 가득 괴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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