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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스크랩] <일일 연재-6> 애호가로 가는 길 -6

아, 이 맛에 그림을 모으는구나!

 

_ 잊혀진 근대미술가 임용련의 <십자가의 상> 발굴기

 

 

그림을 집에 몇 점 걸어놓고 감상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수집을 염두에 두는 애호가라면 전시회를 자주 가는 게 좋다. 어떤 화가가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는지 알 수 있고, 그 시대의 화풍을 파악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림을 자주 접하다 보면 저절로 그림을 보는 안목이 트인다.

 

나는 전시회를 자주 다닐 수 없어 미술잡지와 도록을 많이 본다. 한때는 전시회를 다닐 수 없는 형편이 답답해,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아르바이트 학생을 구해서 매주 화랑가를 돌며 중요한 전시회의 도록을 모아서 보내게 했다. 그러나 비용이 만만치 않아 오래 계속하지는 못했다.

 

나는 미술잡지의 최근호보다 2~3년 전의 잡지를 즐겨 본다. 최근호는 내 수준보다 너무 앞서가, 아는 화가보다 모르는 화가가 많고 그림도 개성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화가의 이름은 오히려 몇 년 전 잡지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10년, 20년 전 잡지도 많이 봤다. 그런 잡지에는 요즘 유명화가들의 젊은 시절 그림이 많이 소개되어, 그들의 작품세계가 어떻게 변화되었지 알 수 있었다.

 

오래된 미술잡지에는 또 새로 발굴된 근대미술이 종종 소개돼 있었다. 나는 그렇게 발굴된 근대미술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나도 미국에서 그런 그림 한 점 발굴하면 좋겠다는 꿈을 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인터넷으로 미국 곳곳의 화랑을 뒤졌고, 경매정보도 열심히 챙겼다. 여행을 가서 자투리시간이 나면,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갖고 화랑을 기웃거렸다. 2000년 2월 미국 동부의 메인 주를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그림이 나를 선택했다

 

 

임용련, <십자가의 상>, 종이에 연필, 35×37cm, 1929.

 

차를 타고 가는데 작은 화랑이 보여 차를 세우고 들어갔다. 허름한 화랑이라 큰 기대는 한 것 아니지만, 역시 얼른 눈에 들어오는 그림이 없었다. 그렇다고 금세 다시 나올 수도 없어, 한쪽 벽부터 훑기 시작했다. 풍경화가 많았다. 워싱턴과 링컨 대통령 초상화도 있었다. 특이하게도 유럽풍 성화가 몇 점 걸려 있었는데, 그중에서 연필로 그린 성화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액자는 허름했지만 어디서 본 듯한 그림이었다. 어디서 봤을까?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한참 바라보던 머리가 하얀 60대 초반의 주인이 다가와 물었다.

 

어디서 왔나요?”

“카우보이가 많은 애리조나에서 왔습니다.”

“아, 내 질문이 좀 모호했군요. 사는 곳이 아니라, 어느 나라 사람인지?”

“한국 사람입니다.”

 

내 대답에 주인은 놀랍다는 듯 나와 그림을 번갈아 보며 “그렇습니까? 그래서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물은 겁니다. 이 그림은 당신네 나라의 화가가 그렸습니다.” 주인은 반가움이 깃든 목소리로 그림을 내렸다. 우리나라 화가라고? 의아한 마음에 주인이 건네준 그림을 자세히 살폈지만, 서명이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성화는 우리나라 화가에게는 익숙지 않은 주제였다.

 

“서명도 없는데 한국 화가의 그림인 줄 어떻게 아십니까?” 내가 묻자 주인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액자 뒷면을 보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액자를 뒤집었다. ‘painter, P. Yim From Seoul Korea, 1929’라고 연필로 씌어 있었다. 액자 테두리에는 ‘Gilbert Yim’이라는 이름과 그림의 크기가 적혀 있었다.

 

 

 

 

‘From Seoul Korea’라는 문구를 보는 순간, 1929년에 이렇게 정교한 드로잉작품을 남긴 한국 화가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가슴이 덜컥하며 큰 쇠빗장이 열리는 것 같았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세월을 미국 동부에서 만난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시켰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구일까? 왜 중세 이후 유럽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성화를 그린 것일까? 한국 이름은 무엇일까?

 

그때 나의 식견으로는 1929년에 미국으로 미술유학을 온 ‘P. Yim’이라는 화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시 미국으로 그림유학을 온 사람은, 전 서울 미대 학장을 지낸 장발 화백 정도가 유일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혹시 하는 생각에 주인에게 화가에 대해 물었으나 역시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시 그림을 살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연필로 그린 드로잉’이었다. 그림은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좋은 그림은 말을 걸기도 하고 유혹을 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경험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근대미술사에 1930년 이전 그림이 흔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지도 모르는 화가의 그림을 샀다. 그림을 들고 화랑 문을 나서면서 무언가에 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림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림이 나를 선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집에 돌아와 화가를 알아보려고 ‘Gilbert Yim’을 검색했다. 그런 화가는 없었다. ‘P. Yim’ 역시 마찬가지였다. 근대미술에 대해 가장 많이 다뤄온 《계간미술》 (현재의 월간미술) 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며칠 후 똑같은 흑백 도판을 발견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왼쪽이 1982년 《계간미술》 여름호에 소개된 흑백도판이고 오른쪽이 내가 구입한 그림이다. 흥분을 가라앉히며 기사를 읽었다. 임용련(1901~?)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이구열 근대미술연구소장이, 1930년 신문에 실린 사진을 참고자료로 실었다. ‘그렇다면 내가 산 그림이?’ 미술애호가로서 평생을 살아도 한 번 만나기 어렵다는 행운을 잡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렸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번쩍 들어 만세를 불렀다.

 

이중섭의 스승, 임용련의 숨겨진 전설을 발견하다

 

임용련은 이중섭이 오산중학을 다닐 때 그림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이중섭의 일생을 기록한 책들을 보면, 임용련은 그의 미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중섭에게 일본 유학을 권한 것도 그였다. 임용련이 없었다면, 이중섭도 어쩌면 그림에 대한 열정을 가슴속에만 간직한 채 평범한 일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두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흑백 도판을 자세히 살폈다. 1930년 ‘부부전’에 출품된 유화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드로잉이 유화의 밑그림인가? 내가 산 그림과 잡지에 실린 그림이 육안으로 보기에는 분명 같은데, 잡지에서는 유화라고 했고 내가 구입한 그림은 드로잉이다. 어찌 된 일일까?

흑백 도판의 등장인물들 크기를 자로 쟀다. 계산기로 드로잉과 흑백 도판의 크기 비율을 계산했다. 크기의 비율뿐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인체비례도 정확히 일치했다. 산, 구름, 나무의 위치도 마찬가지였다.

 

임용련에 대한 다른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1988년 《가나아트》 7~8월 합본호에, 윤범모 경원대 교수의 「분단민족과 예술가의 좌절―백남순 여사의 뉴욕 화실 탐방 2」가 게재되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1930년 11월 5일부터 9일까지 동아일보사에서 개최된 ‘임용련 백남순 부부전’에 출품된 <십자가의 초상>은 임용련의 예일대 입상작의 초본”이라는, 백남순(1904~1994, 임용련의 부인) 화백의 증언이 실려 있었다.

 

이구열 선생 역시 흑백도판 설명에서 ‘부부전’ 출품작이라고 했다. 따라서 내가 구입한 작품과 흑백도판은 같은 그림이었다. 너무나 정교하게 그린 연필드로잉이기에, 실제 작품을 보지 못한 이구열 선생은 당연히 유화일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설명한 것이다. “아하!” 나는 탄성을 지르며 액자를 들고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미술계의 혼동을 내가 구입한 드로잉으로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이 그림을 사지 않고 지나쳤더라면, 이 그림은 계속 드로잉이 아닌 유화로 설명되었을 것이다.

 

나도 의미 있는 근대미술 한 점을 발굴했다는 생각에 신도 나고 의욕도 생겨, 임용련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졌다. 먼저 백남순 화백이 말한 ‘예일대 입상작’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추적했다. ‘입상작’이라면 미술공모전에 출품해서 상을 받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예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미술공모전을 열어 상을 줬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에 연락해 임용련에 대한 자료를 요청했다. 얼마 후 자료 복사비와 발송비 35달러를 먼저 보내라는 연락이 왔다.    -계속

출처 : 재미있는 그림 이야기
글쓴이 : 이충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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