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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동명

시인 김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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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 6. 4 강원 명주~1968. 1. 21 서울.

시인·교육자·정치평론가.

김동명
 
전원을 소재로 향수·비애·고독을 노래했다. 호는 초허(超虛). 어린시절 함흥으로 이사하여 영생중학교를 마친 뒤 서호진 등에서 교사를 지냈으며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종교과에서 공부했다. 1923년 〈개벽〉에 〈당신이 만약 나에게 문을 열어주시면〉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첫 시집 〈나의 거문고〉(1930)를 발표할 때까지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았으며 본격적인 창작활동은 1930년대 이후 이전의 퇴폐적인 시에서 벗어나 건강한 전원시를 쓰면서부터이다. 1938년 습작기의 티를 벗은 〈파초〉를 펴냈는데 그중 〈파초〉·〈수선화〉와 해방 뒤에 발표한 〈하늘〉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빌어 조국에 대한 향수를 노래했다. 1942년 〈술노래〉·〈광인〉 등을 발표한 뒤에는 작품활동을 한동안 그만두고 목상(木商)을 하며 살았다. 해방 뒤에는 정치활동을 주로 하여 조선민주당 함남 도위원장을 지냈으나 함흥학생사건으로 탄압을 피해 월남했다.

그뒤에는 창작에만 힘써 강한 사회성과 고발정신이 담긴 시를 썼다. 북한의 체제를 비판한 시집 〈삼팔선〉(1947)을 펴냈고 일제의 태평양전쟁을 비판한 시집 〈진주만〉(1954) 등을 펴내 아세아자유문학상을 받았다. 1957년 사회현실을 고발한 시집 〈목격자〉를 펴낸 뒤 4·19혁명을 고비로 시보다 정치평론을 주로 썼다. 참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으나 5·16군사정변으로 정치적 뜻을 펴지 못하고 말았다. 정치평론집 〈적과 동지〉·〈역사의 배후에서〉(1958) 등이 있고 마지막 시집으로 〈내 마음〉(1964)이 있다          (촐처 다음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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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원산으로 이사하여 1920년 함흥 영생중학(永生中學)을 졸업하였다.
1925년에 일본에 가 낮에는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신학과를, 밤에는 니혼대학(日本大學)철학과를 수학, 졸업하였다. 사회활동으로 1921년 흥남에 있는 동진소학교(東進小學校)교사로 출발하여 여러 곳에서 교편을 잡았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흥남시의 동광학원(東光學院)원장을 지냈으며 광복 후에는 흥남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했으나 흥남학생의거사건(1946)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교화소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났다.
1947년 단신으로 월남하여 한국신학대학 교수, 다음해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같은해 조선민주당 정치부장을, 1952년에는 민주국민당 문화부장으로 활약했다.
1960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를 사직하고 참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출처 디지털 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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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 교과서에서 접했던

"남국을 언제 떠났노......" 라는시 '파초'나

"내마음은 호수요..." 라는 아름다운 시의 저자로만 

알고  있던 김동명시인에

대해 요즘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어

좀 찾아보았다.

얼마전  친일파문인 명단이 공개됐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우리가 알만한 많은 훌륭한 문인들이 그명단에 들어 있는 걸 보고는

내눈이, 내귀가 의심스러울 정도 였었는데......

 

그런데 이 김동명 시인은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고

일본어로 창작 활동도 하지 않은 분이라는걸

최근 알게 되었다.

이분은 위에 경력에도 나와 있듯이 일본에서 공부 하신분이다.

그러니 일본어에 당연히 능통하셨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로 창작활동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1901년에 태어나 68년에 돌아가셨으면 인생의 반을 일제치하에서

보냈는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우리의 정신을 꿋꿋이

지켜나가게 헸는지 궁금하기 이를데 없다.

 

친일파 문인들을 단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꿋꿋하게 우리 말과 글을 지켜낸 분들에 대한 재조명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