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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삶

삶,그 자체가 자기치유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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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그 자체가 자기치유의 드라마

삶이란 그 자체가 자기치유의 드라마다.예를 들자. 어린시절 엄마 젖을 충분히 빨아보지 못한 남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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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그 자체가 자기치유의 드라마다.

예를 들자. 어린시절 엄마 젖을 충분히 빨아보지 못한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늘 담배를 끊지 못해 고민이다.

끊어야지..금연 꼭 해야지..하면서도..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말 끊지 못한다.

특히 왠지 마음이 허전하고 외로울 때 그는 어김없이 오른쪽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는다..

담배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지만 이 사람은 자기가 어린시절 받지 못한 따스한 엄마의 젖가슴과 젖꼭지를 대신하는

담배를 빨면서 뭔지 모를 아늑함을 느낀다.

역시 남자의 이야기다.

이 남자는 야동에 심취해있다. 하루에도 밥은 안 먹어도 야동은 반드시 봐야 한다. 그래야 편안함을 느낀다.

그가 핸드폰에 아내 몰래 저장한 야동은 하나같이 가슴이 큰 여자들이다.

젖가슴이 큰 여자들과 성관계하는 장면을 보면 이 사람은 뭔지 모를 희열을 느낀다. 성욕의 만족만 있는 게 아니다. 희열이다.

그는 어린시절 역시 엄마의 젖가슴을 한참 누려야 할 시절에 엄마가 젖이 나오질 않아 여기저기 가슴 큰 보모들에게 젖동냥을 해야 했다.

그러니까..우리 삶은 늘 그런 것 같다. 내 관점이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만나 본 사람들 그리고 누구보다 나 자신을 보아도 그렇다.

대상관계이론가였던 위니캇은 어린아기들이 3-4개월 때부터 엄마가 있고 없음을 알아차리는데 엄마가 없을 때 느끼는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중간대상을 만든다고 한다. 중간대상이란 주로 베게, 이불, 담요, 수건, 곰인형 등이다.

 

위니캇에 의하면 아기는 엄마가 부재하다는 불안감을 치유하기 위해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런 독특한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을 위로한다는 것이다. 그게..그게 사람이다. 사람은 결코 상처받는다고 그냥 끝나지 않는다. 반드시 상처를 치유하려고 몸부림친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으면 한없이 분노한다. 그러나, 그 분노조차도 애도하지 못해 생긴 병리적 반응이라는 해석이 있다.

즉 분노를 폭발시켜서라도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도 치유의 과정이다.

단 그 치유의 과정이 너무 미숙하고 거칠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누군가에게 욕을 한다는 것, 분노를 폭발시킨다는 것

모두 다 미숙하지만 치유의 과정이다. 단 복수를 위해 누군가를 폭행하고 괴롭히고 죽이는 행위는 제외다.

그건 복수지 치유라고 볼 수 없다. 우리의 삶을 보면 모든 것이 그렇다.

모두 다 허전하면 채우려 하고 그리우면 만나려 하고 아프면 나으려하고 고통스러우면 평안을 추구한다. 그게 사람이고 그게 삶이다.

단..다시 말하지만 인생의 모든 과정이 치유의 과정이지만 그 치유의 과정을 성숙함으로 푸느냐 미숙함으로 푸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마음이 아픈데 그 아픈 마음의 이유와 해결을 찾기 위해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다가는 나중에 치유는 커녕 돈만 날릴 수 있다.

병원에 가서 한번 진단받으면 될 문제를 이 사람 저 사람 이상한 돌파리를 만나 오진만 받다 나중에 몸이 더 망가지는 것과 유사하다.

삶 그 자체가 치유의 드라마라면 기왕이면 성숙한 방법으로 자기를 치유하는 편이 낫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정신분석을 하였기에 하는 말이지만 담배를 피면서 구강기에 결핍된 모성애를 대체하려고 하지 말고

왜 담배를 그렇게 의지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분석을 받는 일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야동에 너무 심취해 살아가는 것 보다 성숙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편이 더 낫다고 본다.

아기에게는 곰인형이 필요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곰인형을 계속 붙잡지 않으면 하루라도 제대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면 그것은 어딘지

이상한 모양새가 될 것이다. 치유의 매듭을 지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애도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난 개인적으로 행복하지 않은 중고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이 너무 한 맺혀 그 때의 나를 애도하며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 시절에 이미 겪었어야 할 상처들이 늘 무의식의 언저리에 맴돌다 뭔가가 자극이 되면 그토록 나를 괴롭게 했던 것이다.

이제..난 중학생도 고등학생도 아니다. 그러니 그런 과거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 애도하고 떠나보내야 한다.

그것이 되지 않으니 상처의 악몽 속에 다시 갇혀지내는 것이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지만..돌이켜보면 자기치유가 제대로 되지 않을 때 계속 계속 아픈 것이다.

아프며 커가고 성장하고 성숙하는게 인생이지만 너무 아프게 성장한다면 그것은 성장이전에 상처가 너무 깊거나 치유가 너무 얕은 것이다.

그러나, 억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살아온 고통의 나날들이 그렇게 치유된 것만으로도 삶은 그래도.. 아름다왔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