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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삶

하나님,성서,예수,구원을 잇는 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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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성서, 예수, 구원을 잇는 끈

신학대학 4학년 시절, 평소 따르던 신앙적 지도자에게 깊은 배신을 겪고 충동적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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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대학 4학년 시절, 평소 따르던 신앙적 지도자에게 깊은 배신을 겪고 충동적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사건은 내 인생 25년을 한 순간에 뒤돌아보게 만드는 너무나 충격적 경험이었다.

10층 아파트 난간에서 조금만 더 몸을 기울였다면 떨어졌을 상황이었다. 너무나 슬픈데 우습게도 다리에 힘이 풀리며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 아니라 뒤 아파트 복도로 쓰러지면서 나는 통곡을 하였다. 너무나 삶이 힘들었다.

그 때 사람들 지나다니는 그 아파트 통로에 누워 눈물을 흘리며 엎어진 나를 내가 느꼈다. "난 내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와 있구나"

그리고 아주 이상한 경험을 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으니 이제는 정말 올라갈 일만 남았구나.."라는 생각이 스친 것이다.

벌써..30여년 전 일이 되었다. 나는 그 일 이후로 지금까지 올라오며 삶을 살았다. 그 시절 죽기 직전에 나를 살린 말씀이 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느니라" -요한1서 4장

그 당시만 해도 나는 하나님을 두렵게만 생각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을 fear 벌 주는 공포스러운 신으로만 오해한 것이다.

나는 결심해야만 했다. 두려움으로서의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사랑으로서의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결국 사랑의 하나님이 이겼다.

그 때 깨달은 진리는 하나님을 사랑으로 체험하고 인식할 적에 성경이 열린다는 것이다.

성경을 아무리 보고 연구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깊은 은혜라는 렌즈로 보지 못하면 글자의 나열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적 없는 사람들 머리에는 오로지 이성적 관점과 의심의 관점 비평의 관점만 가득하다. 그래서 성경을

신화적 세계의 구닥다리 유산으로 전락시킨다. 나는 12년간을 신학공부에 매진하며 살았었다.

당시 보수적이던 침례교 신학을 9년, 진보적 자유적 학풍이던 서대문구에 있는 감리교신학대에서 3년(3년의 시간은 청강생으로

공부함)을 보내며 자칭 진보와 보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성서를 학문적으로 보든 교리적으로 보든 이단을 비판하려고 보든 역사적 산물로 보든 다 좋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전제하고 성서를 읽는 일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성서를 읽다보면 그야말로 성서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계시록 끝까지

하나님의 연애편지와 같다. 이 말은 예전에 C.C.C 대표로 계셨던 고 김준곤 목사의 예수칼럼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선명히 기억난다.

나는 도올 김용옥 교수를 매우 좋아한다. 그의 강의 대부분을 들었고 그의 저서 대부분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의 싸인을 소중히

여길만큼 도올의 사상을 좋아한다. 그러나 단 하나..그에게 매우 아슁움을 갖고 있는 부분이 있다.

성서해석의 관점이다. 그는 신앙인이 아니다. 자신의 신념으로 신앙을 갖고 계신지는 모르나 성서적 신앙인은 분명 아니다.

그러다보니 성서해석이 매우 학구적 이성적 비평적이다. 다 좋다. 그리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은혜와 사랑에 대한 전제는

전혀 없어 보인다. 도올은 이 시대의 사도 바울같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바울 되기 이전에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야 했다. 그것이 인간적 교만과 편견, 자랑이라는 비늘이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도올의 눈을 만져주시길 기도한다. 도올 추종자들이 이런 글을 보면 나를 비난하시던데 나는 도올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그러니 이런 비판조차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건 존경이 아니라 지나친 추종이며 도올교 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 성서, 예수, 구원을 잇는 끈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이다. 그 관점으로 성서를 볼 때 비로소 성서가 열린다.

그 관점 없이 성서를 읽으면 이건 말도 안되는 가설이며 허구이고 신화에 불과한 잡설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성서는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고 깊이 사랑하는 마음자세를 갖고 봐야 한다. 그래야 성서가 성서로 보여지는 것이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다는 2021번째 부활주일이다. 설레여서인지 새벽 4시에 눈이 떠졌다.

인간의 가장 큰 고민은 죽음 문제다. 누구나 죽게 된다. 아무리 생명 연장을 해도 죽는다. 우리 부모님도 언젠가 죽음을 맞으실테고

나도 언젠가 세상을 떠날 것이다. 삶이 다 허무하다고들 한다. 살아보니 진짜 그랬다. 삶은 허무하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다. 허무한 삶이지만 허무함이 없는 영원한 세계가 존재하며 영원한 만남과 하나됨이 있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사건의 시작을 알리신 사건이 예수 부활 사건이다.

나는 이 사건을 신앙고백적 사건으로만 믿지 않는다. 예수 부활사건은 역사적 사건이다. 인류가 창조되었든 진화되었든 단 한 번

일어났던 이 엄청난 사건은 우리 인류에게 소망이 되는 유일무이한 사건이 된다.

예전에는 멋 모르고 그저 교리니 믿었고 외우니 믿었고 믿으라 해서 믿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부활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며

내적 투쟁을 하다 이 부활이 사실이어도 이것을 믿어지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응답을 받고 모든 의심이 사라졌다.

수영장 가서 처음 수영배울 때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힘빼요"란다. 그렇다. 신앙 기독교 신앙은 내 자아의 힘을 빼면 뜨고 보인다.

성서는 말씀한다. 자아는 고양시킬 것도 다듬을 것도 교육시킬 것도 아니라고 말이다.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죽었다 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애벌레 같다. 애벌레가 그 자체로 살면 죽는다. 애벌레는 반드시 껍질을 벗어 날아야 산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실제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고 다시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자연사로 죽기를 바라며 대부분 그리 살다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 죽더라도 예수의 부활의 언약을 가슴에 품고 산다면 우리의 몸은 먼지로 돌아갈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어느 순간

우리 육신의 몸과 영혼이 변화된 "영적인 몸"을 입고 예수를 만날 것을 확신한다.

그래서 그리웠던 모든 분들을 영적인 몸으로 만나 영원히(여기서 영원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시간만큼) 살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사랑의 눈으로 성서를 보도록 기도하자. 눈으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영으로 성경이 보여지는 읽기를 해 보자.

성경을 돈 버는 책, 인류의 역사의 종말이 예고된 책, 뭔가를 증명하는 책,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필요한 책으로 만들지 말자.

그것도 필요할지 모르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는 더럽게 말 안 듣는 인류를 위한 일방적 러브 레터와

같다. 그 사랑의 언약을 온 몸으로 보여주신 날이 바로 오늘 예수 부활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