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변상규교수 열린연구실:https://m.blog.naver.com/jesusbyun/221569706726
내가 좋아하는 렘브란트의 아브라함과 이삭이라는 작품의 스케치 그림이다.
아들 이삭의 눈을 가리고 위치로 봐서는 왼쪽 손으로 아들의 심장을 찌르려 하는 순간..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아주 다급하게 아브라함의 손목을 꽉 쥐는 그림이다.
나는 이 그림에서 깊은 슬픔을 느낀다..하나님은 이삭이 죽는 걸 바라신 게 아니었다.
이삭을 바치라 하셨지만 그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대신
뿔이 걸린 양한마리를 대신 번제로 드리게 하신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살려주셨는데..정작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는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칼을 들어 아들을 치려는 순간 그 아비의 마음을 모르지 않으셨을 하나님이 정작 당신의 독생자가 십자가 형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절규할 적에 그는 침묵하신 게 다였다.
그래서..다시 말하지만 구약의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신데 신약의 하나님은 무능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분의 무능하심이 인류를 살리셨으니 그 무능이 사실 가장 큰 전능이었다는 역설이 나온다. 구원은 역설이다.
죄인이 의인되고 죽은 자가 다시 살며 영벌자가 영생자가 되고 진노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가 되니 이런 역설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말이다..
많은 분들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이 사건이야말로
그가 믿음의 조상임을 증명해 낸 사건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이 아주 틀리지 않은 해석이지만 옳은 해석도 아님을
기억해야 하겠다. 성경을 전체로 보면 말이 달라진다.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이 믿음 좋은 게 아니라 그의 하나님이 믿음이
좋으시다. 즉 하나님의 열심이 아브라함을 기다려주시고 연단하시면서 그가(아브라함)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수준의
믿음의 자리에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참아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다려주시며 도우신 하나님의 열심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만들어 가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착각들을 하며 살아간다. 내 믿음이 좋아 여기까지 왔고 내가 잘 나서 여기까지 살아온 줄..그거 다 웃기는 소리다.
내가 기독교인이라 입에 발린 말이어서가 아니라..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것이다.
하나님의 열심이 나를 이 자리까지 이끄셨고 나를 만드셨고 사용해 주신 것이다.
나는..이제 3년이 되어가지만..문득 아이엄마를 생각한다. 왜 데려가셨을까..왜..내가 한심한 놈이지만 데려가실 정도로
한심했나 내가..그런 자괴감으로 정말 단 하루도 그런 자괴감없이 하루를 보낸 적이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 고통을 어떻게 참았겠나..섭리를 믿는 믿음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며 그 분의 알 수 없는
섭리를 믿는다..그 섭리가 나를 살게 하고 나를 살려주는 이유다. 섭리의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인데 그 절대 믿음
은 내 믿음이 아니라 믿어지게 하셔서 믿는 믿음이라 말하고 싶다. 그러니..자랑할 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기독교는..깊어질수록 그게 분명히 드러난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것.
내가 누군가의 전도로 교회 나와 예수 믿는 게 아니라..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나를 그를 통해 부르신 것이다.
영원한 수동성이다. 믿는 게 아니라 믿게 하심이며 내가 하는 게 아니며 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자랑은 없다.
진정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십자가와 다시 사신 부활의 영광 뿐이다. 진심이다.
그러니..우리가 자격지심 갖고 하나님을 어려워 할 일도 없고 도덕과 윤리로 선한 체 잘난 체 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신이 보시기에 인간은 모두 다 죄걸레이니 걸레는 깨끗해도 걸레이고 더러워도 걸레 아닌가..오십보 백보다.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과 이중성과 모순과 한심함을 다 아시고도 "나에게 오라" 하시니..그게 은혜지 뭐가 은혜던가..
어린시절 벤허라는 영화를 보고 너무 울컥한 장면이 나온다. 벤허의 원수 멧살라가 마차 경기에서 패하고 죽어가는 순간..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다 이긴 줄 알겠지..네 누이와 어미가 어디 있는 줄 아나?" 너무 놀란 벤허가 소리친다.
어디 있느냐고..그러자 멧살라가 죽어가며 한 마디 한다. "문둥이..골..짜기.."
그러자 벤허는 미친듯 문둥이들이 모여 사는 골짜기로 달려가는데 굴 속에 문둥병자들이 가득한데 맨 손으로 벤허가
이 사람 저 사람을 만지며 얼굴을 확인하는데 드디어 저 쪽에 모녀 문둥병 환자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그 모녀가 외친다.
"벤허야 오지마라!" 너무나 놀란 벤허가 묻는다. "왜요?"
"우리..문둥병이야.." 그러자 벤허가 한 말이 가슴을 울렸다. "그게 어때서요!" 그리고 그는 다가가 누이와 어미를 안고
눈물을 흘리며 그 두 사람을 예수께 인도하는데 그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었고 놀랍게 예수가 죽는 순간..
거대한 폭풍우가 치면서 이 두 모녀의 병이 치유되는 장면이 극적으로 등장했다..
어린 마음에 벤허의 그 말..그게 어때서요..이 말이 나에게는 복음과 같았다.
우리가 죄로 인해 스스로를 부정하며 하나님께 못 가겠다고 죄송하다고 난 쓰레기 죄인이라고 자책할 적에 하나님은
우리에게..그게 어때서 하며 다가와 우리를 안아주시고 우리의 피고름을 닦아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이 다 하셔서 은혜다. 내가 하는 게 없다. 전도 좀 안한다고 못 한다고 봉사나 헌금 좀 못하거나
덜했다고 그 분이 우리를 뭐라하시겠나..절대 절대 아니다.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니 스스로 정죄하고 스스로 규정하고 스스로 기준을 만든 걸 못 지켜 스스로 벌 주는 이런 일 좀 그만하자.
그게 율법이 아니면 뭐가 율법인가..
하나님은 좋으신 분인데 미치도록 좋으신 분이라 나는 그 좋으심에 엉엉 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 은혜가 나를 버티게
한다. 그 섭리가 내가 살 이유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이제는 다 알려진 이야기..다시 들어보자..
누군가 죽어 자기 인생을 보니 예수님과 자기 발자욱이 네 개가 인생 해변에 찍혀있던데 가만히 보니 자기 인생의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발자욱이 두 개만 있어 예수께 원망했다 한다.
"왜 가장 힘들 때 나를 두고 가셨습니까..왜.."
그 때 주가 하신 말씀..
"얘야 저 발자욱은 너가 지쳐 쓰려졌을 적에 너를..업고 갔던 발자욱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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