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변상규교수의 열린 연구실https://m.blog.naver.com/jesusbyun/221765037048]
에리히 프롬의 책 "너희가 신처럼 되리라"에서 프롬은 창세기에 나타난 아담 하와 추방 사건을 대단히 특이하게 해석했다.
프롬에 의하면 인간이 자의식을 갖게된 계기가 된 사건이 바로 낙원추방이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어느 날 "싫어!" 라고 말하거나 거짓말을 한다면 그걸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신만의 주관적인 내면세계를
갖게 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프롬을 존경하고 좋아하기에 이런 독특한 프롬의 해석에 큰 이의를 제기할 마음이 없다.
다만 성서 자체를 살펴보자면 프롬이 다 보지못한 면들이 많음을 말하고 싶다.
요즘 자주 등장하는 진화심리학적으로 봐도 성서는 매우 독특한 문서임에 틀림없다. 진화심리학으로 볼 적에 인간은 진화된 유인원에 불과하다
그런데 혹시 그렇다고 전제하더라도 생각해볼 것이 있다. 과연 원숭이나 오랑우탄같은 유인원들은 자의식이 있을까
자의식이 없어보이진 않지만 인간만큼 예민하고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반성할 수준은 되지 못함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거기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이런 유인원들이 자신들이 "벗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이 벗었음을 신께 고하는 종(種)은 오로지 인간 뿐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묻자 아담은 벗었기에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회피하듯 말한다)
인간만 그런 자의식을 갖고 산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을 찾아온다. 사실 이것부터가 은혜의 사건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는 순간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사실 아담 하와 그거 먹었는데 죽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가 큰 일을 저지르면 달려오는 엄마처럼 신은 인간에게 달려오신 것 같다. 그리고 묻는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신이신 하나님이 아담 하와가 어데 숨어있는지 몰라서 묻는 것 아닐 것이다. 그의 존재를 묻는 것이다. 존재의 위치를 묻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신의 이 물음에 아담은 어의상실 대답을 숨어서 했다. "벗었기에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래서 나는 이 세 마디의 핵심 감정
벗었다는 수치심, 뭔지 모를 두려움, 숨다 - 도피. 어디로? 저 무의식에로의 도피.
그리고 이런 수치심, 두려움, 도피야말로 인간의 원초적 죄로인해 생겨난 원죄의 감정이라 본다.
죄를 짓고 맨 처음 느낀 감정은 죄의식이 아니었다! 이것도 참 역설이다. 사실 그 때까지도 아담은 죄가 무엇이었는지조차 모르는 듯 하다.
그저 갑자기 자의식이 생겨났는데 그 자의식은 수치심을 동반한 자의식이었다. 아무튼 벗었기에 숨었다는 그 아담에게 하나님은 다시 물으신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여기서 고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고자질 혹은 고발이 될 것이다.
자..누가 아담에게 벗었음을 고하였을까? 역(逆)으로 말하자면 하나님도 아담에게 벗었다 정죄하신 적 없다.
하나님도 뭐라하지 않으시는데도 누가 더 하나님보다 크기에 아담에게 벗었다 정죄한다는 말인가? 하와가 정죄하였는가? 뱀이 정죄하였는가?
그렇다. 아무도 정죄하지도 고하지도 않았다. 오직 아담 제 스스로 그런 감정을 느꼈을 뿐이다. 자 여기 인간의 실존적 비극이 탄생했다.
아무도 벗었다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도 그러지 않으셨는데도 바로 자기 자신이 자승자박 드라마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나는 이게 원죄라고 본다.
원죄란 자승자박이다. 원죄를 신이 선고한다고 말하지 말자. 아담 제 스스로 뭐라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말로 표현하자만 아담의 내면에 아주 "가혹한 초자아"가 형성된 것이다.
인류는 성서에 의하면 그렇게 가혹한 초자아와 수치심을 동반한 체 자의식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자의식이라는 말을 정신분석으로 풀면 부정적 방어기제에 해당한다. 사실..이 때로부터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오해해왔다.
하나님도 뭐라하지 않는데 자기 스스로 하나님이 자신을 고발했다고 오해한다.
제 자신이 제 자신에게 고발하는 하나님 노릇한다. 이게 바로 인간의 자기 분열, 실존적 분열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은 인간을 동산에서 쫓아내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 창세기 3장 22절, 24절 -
신은 인간을 낙원에서 추방시켰다. 그런데 가만히 보라. 신은 보복적 차원에서 그리하신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상태에서 동산 중앙의 선악과 나무 옆에 있던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먹게 되면 그야말로 죄인이 된 상태에서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방안에 형광등이 갑자기 깨어졌다면 부모가 아이에게 취할 수 있는 행동이 무얼까? 나가라!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아이가 있다면 부모가 제대로 된 부모라면 속히 그 아이를 방 안에서 쫓아낼 것이다. 방 안은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승자박하는 인간은 그런 걸 못 본다. 오히려 신이 그 좋은 동산에서 자신을 "쫓아낸" 바로 그것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은 신에게 분노하며 반드시 복수하려 든다. 내 말로 풀어보겠다.
"아니! 나를 몰아내? 엉? 아니 그 선악과 하나 먹었다고? 나와 하와를 쫓아내게 하고 저주를 걸고 땅을 파서 먹으라고 하고
이게 뭐야? 엉? 아 하나님이란 게 저 따우야! 하나님 당신 두고 봐.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테니"
..그리고 인간은 이 시간 이후로 신을 두려워하고 신을 배척하고 신에 대해 오해하고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게 되었다.
그리고 먼 세월이 흘러 그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예상한 것처럼 가만 냅 두지 않았다.
그를 몰아붙였고 그를 자신이 받은만큼 고대로 돌려주었다. 즉 그 예수를 쫓아낸 것이다. 어디로? 바로 십자가 형틀로 말이다.
그 십자가로 예수를 쫓아낸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 하와를 살리기 위해 동산에서 쫓아내었는데 아담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기 위해
십자가로 쫓아내어 자신들을 쫓아낸 것에 대해 그야말로 제대로 복수하였다!
나는..누가 뭐래도 이게 바로 인간의 근원적 원죄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회개하게 되고 회개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깨어진 감각이 회복되면서 동시에 성령을 통해 자신이 누군지 하나님이 누군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무엇인지 크게 자각하게 된다고 믿는다.
아주 쉽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푼다는 것이다. 그 오해 하나같이 자기가 만든 오해다.
누가 그렇게 오해하라고 충동질하지도 않았고 부추기지도 않았다. 오직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을 피하고 두려워하고 도피해 버린 것이다..
나는 인간관계에서 오해를 받는 것만큼 배신을 당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하는 마음을 갖는다..
아무리 하나님이라지만 자기가 창조한 피조물들에게 그런 취급과 그런 오해를 받는다면..정말 아무리 하나님이시지만 그 마음이 어떠셨을까 싶다.
하나님도 안식이 필요해서 안식하셨는데 나는 늘..그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장소가 저 우주 공간이나 바닷 속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라 생각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에서 안식하신다. 사람의 마음을 초월해계시지만 동시에 사람의 마음에서 쉼을 갖는 분이 하나님이시라 믿어왔다..
그런데 그 사람들 마음에 안식이 없다. 안식없는 마음은 그 자체가 지옥이다.
하나님은 선악과 옆에 생명나무를 두셨다. 성 이레니우스 교부에 의하면 하나님은 언젠가 사람에게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가르치시기 위해 선악과를 두셨다 한다. 그런데 뱀이 그 시기를 앞당긴다. 이게 문제다. 의과대학에 가서 위대한 외과의사가 될 아이가 있다.
그런데 이 아이에게 외과의사가 되서 들려줘야할 수술칼을 아이에게 주면 사람을 살리기는커녕 자신도 찔리고 남도 다치게 할 수 있다.
마찬가지다.
아담 하와가 선악을 알기에 미숙한 상태에서 뱀은 그것을 알게 했다. 어찌보면 뱀은 인간이 생명나무를 먹는 것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먹으라 하신 열매는 동산나무의 열매들과 생명나무 열매이다. 그런데 뱀은 인간에게 생명나무가 아닌 선악과 나무를 먼저 먹게 유혹했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의 기회를 주셨으나 인간은 정말 어리석게도 선악에 목숨을 건다! 우리의 문제는 생명의 문제다. 선악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선악의 논리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명은 뒷전이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논리를 갖고 생명을 죽인 것이 인간이 만든 역사 아닌가!
그래서 계시록 마지막에는 이 생명나무가 다시 등장한다. 그것은 일종의 비유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바로 생명나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생명나무를 먹지 않고 여전히 선악만 따진다. 옳고 그름에 목숨을 건다..
그게 바로 자기 의(義)다. 선악에는 옳음이 있다. 그러나, 모든 선에는 악이 스며있을 수 있고 모든 악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선이 스며있을 수 있다.
선과 악은 쌍둥이 같다. 칼 융의 분석심리학을 공부해보면 더욱 더 그러하다..선악에 구분은 있으나 옳고 그른 것은 애매한 부분이 있다.
그른 것 보단 옳은 게 더 좋겠지만 우리의 궁극적 문제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생명의 문제이다.
결론
인간의 자의식은 원죄로 인해 왜곡되었다. 신도 우리의 벗음을 뭐라하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잘못해 놓고 신을 들먹거린다.
아마 신이 그러실 지 모르겠다."야 인생들아 나 안 그래! 왜 내게 그런 부정적 이미지를 부여하고 오해하나!"
누가 그러더라. 신은 우리가 주일 예배 한 번도 드리지 않아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헌금 100원 하지 않아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나님이 거지는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 특히 신앙인들은 뭐 하나 빠지면 큰 일 나는 줄 안다..
사실 우리가 교회가서 주보에 인쇄된 예배순서에 근거하여 예배순서를 드리는 건가 예배를 드리는건가? 때로 우리는..예배순서 드려놓고 예배"드렸다"고 말한다..오히려 신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 시편 51편 16-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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