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 다닐때 새학기만 되면
가정환경조사서를 써오라고 했었다.
부모님 직업.부모님 학력
그리고 집에 TV나 피아노 같은 문화용품이
있는지
집이 자택인지 전세인지 월세인지 같은 것도 있었고...
내가 교사일때도 그리고
우리 아이들 학교 다닐 때도 이런게 있었던거 같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내가 중학교 때 일이다
아버지 직업을 뭐라고 써야할지 몰라서
부모님께 여쭤봤다.
아버지는 노동자라고 쓰라고 하셨고,엄마는 기술자라고 쓰라고하셨다.
나는 왜 두분이 다르게 얘기하시는지 처음엔 몰랐다
아버지는 노동자라고 쓰라고 말씀하시면서
엄마에게 노동자라고 쓰면 어때서 그러냐고 하셨다
세상에 노동자같이 깨끗하고 정직한 직업은 없다고 하시면서..
일한만큼 받고 받은만큼 쓰는게 노동자라고
노동자에게는 부정부패가 없다고...
엄마는 노동자라고 쓰면 노동자들이 대개
못사니까 사람들이 깔본다고 그리고 노동자가 무슨 직업이냐고 거의 무직이나 마찬가지로 여기는데 뭐하러 애 기죽게 노동자라고 쓰냐고 항변하셨다.
아버지는 노동자가 못사는건 돈을 못벌어서가
아니라 번돈을 술먹고 담배피고 도박하는데
탕진해서 못사는거라고 절약하며 모으고 살면
노동자도 얼마든지 잘살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두분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당당하게 말씀 하시는
아버지의견이 더 믿을만해서 중1,중2때는 노동자라고 썼다.
그런데 중2때 문제가 생겼다.
중1때 담임선생님이 중2때도 담임이 되셨는데
그때 우리학교가 음악연구지정학교여서
1인1오르간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음악실에
60대의 오르간을 갖추기위한 기부금을 걷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가정통신문을 받고 흔쾌히 기부금을 내라고 돈을 주셨다..
그래서 기부금을 냈는데 선생님이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곤 마침내 담임선생님은 하지말아야할 말을
아이들에게 하고 말았다
오인숙처럼 이렇게 형편이 어려운 애도 기부금을 내는데 너네들 뭐하는거니 하면서 애들에게 기부금 독촉을 하는데 내가 깜짝놀랬다
나는 그때까지 우리집 형편이 어렵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나는 선생님이 왜 우리집형편이 어려울거라고 생각했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수가 없었다.
우리집에 가정방문을 오신적도 없었는데...
집에가서 엄마에게 그 이야길했더니 엄마가 아마도 니가 아버지 직업을 노동자로 써내서 그럴거라고 하셨다.(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많이 속상했을거 같다)
그때 너무 상처를 받아서 그일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질 않는다.
그 다음부터는 아버지 직업난에 절대 노동자라고 쓰지 않았다.역시 엄마가 옳았다.
아버지 말씀이 더 옳았지만 사회적 인식하고는 거리가 있었다
아버지는 제재소에서 일하셨다. 전기로 톱을 가는 일이셨다. 아버지는 당신이 일하시는 곳으로 우리
남매들을 데려가서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여주시곤하셨다. 어린 내가 보기에 매우 어려운 일이고 제재소에서는 중요한 일인거 같았다.
아버지키의 몇배가 되는 크고 길다랗고 날카로운 톱을
전기로 가는거였다. 전기로 톱을 갈때마다 쇠를 긁는듯한 날카로운 소리와 마찰에서 나오는 스파크가 무섭게 느껴져서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아버지는
우리가 매우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웠는지 제재소 사람들에게 우릴 늘 소개하시고 그러셨던 것같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 시선을 별로 신경쓰시지
않으신것 같았다.
일터에 아이들 데리고 오면 싫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아버지는 성실하셔서 사람들한테 신뢰감을 주었는지 한 제재소가 아니라 여러군데 심지어는 다른 지방까지도 다니셨다.
나중엔 기계설치 하는 일까지 하셔서 돈을 많이 번다고 내게 은근히 자랑도 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때 남자는 한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면
40대쯤엔 전문가가 되서 돈을 잘벌게 되는가보다하고생각했었다.
중간에 어려운 친척들 살게 해준다고 운수사업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나면서 망해가지고 (그시절엔 보험이 없어서 내쪽의 사고가 나면 그냥 망하던 시절) 2,3년 고생하시긴 했지만 그때 진빚도 아버지가 열심히 일하셔서 모두 갚으셨다.
아버지는 황해도해주에서 월남하신 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생활력이 참 강하셨다.
이북에서는 지주의 아들이었다고한다. 북한이 공산화되자마자 인민군에 안끌려가려고 도망 다니시다가 6.25가 터지면서 월남을 하셨단다.
그시절 생계를 위해 배우신게 제재소 기술이었다고한다.
함께 넘어오신 아버지 친척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셨다.
아버진 열심히 일하시고 엄마는 열심히 모으시며 사신거 같다.
하지만 두분다 혼자 잘살자고 욕심부리시지는 않으셨다
늘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셨다.
우리 어릴때 야매할머니라는 분이 우리집엘
자주 오셨는데 아버지가 그분 딱하다고 물건을
자주사주셨다.
그 할머니 아들이 아파서 생계활동을 못했는지
할머니가 미제 야매물건장사로 식구들을
먹여살리고 있었다.
며느리는 집을 나갔는지 일찍 죽었었는지
알수없었으나 어쨌든 할머니가 돈벌이를
하고 계셨다.
그할머니는 주로 잘 팔지못한 날 마지막으로
우리집에 오시곤 했다.
엄마는 그분께 고생하신다면서 저녁상을 차려드렸고
아버지는 그 할머니에게 우리들 줄 코코아,건포도같
은 걸 팔아주셨는데 겨울이면
따끈하고 달달한 코코아차를 먹는게 즐거운 일중 하나였다
부모님은 우리들 먹는것만 봐도 배부르시다고
늘 말씀 하셨다.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도 어려운 사람들은 취직 시켜주셔서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아버지께 와서
사정얘길 하곤했다.
뿐만아니라 친가외가 할 것없이 학비가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애가 있으면 학비를 대주었다
울안에 세사는 집도 늘 두분이 챙기셔서
세사는 사람들이 이사가기 싫다고까지 했었다.
잘살아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고생하면서
사셨기에 고생하는 사람들 심정을 알아서
그러신거같았다.
요즘 최순실사태를 보면서 최고학부를나오고
미국유수대학에서 공부하고 온 인재들이
사리사욕에 찌든 최순실같은 여자에게 주억거리며
공모해서 엄청난 비리를 저지르고도
모로쇠로 나오는걸 보면서 노동자가 가장
깨끗하다고 말씀 하시던 아버지가 자꾸 생각나서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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