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에라스무스
중세가 지나고 종교개혁의 바람이 온 유럽에 불어닥치면서 서서히 사람들의 자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교회라는 집단주의에서 나 라는 자의식의 강조가 부각되었고, 신에서 인간으로, 성경에서 그리스 고전으로, 종교에서 과학으로
서서히 그야말로 패러다음의 대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루터를 많이 도왔다. 그 중에서 에라스무스
라는 학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 두 사람은 의기투합 동지같은 삶을 살았으나 차츰 그들 사이에 의견 대립이 커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에라스무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는데 이런 말씀을 이루려면 인간의 지고지순한 노력과 헌신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루터는 인간에게는 거룩할 요소가 단 1도 없다고 주장했다.
즉 에라스무스는 인간의지의 선함을 주장했으나 루터는 그 선한 의지가 타락했기에 인간에게 있는 자유의지는 죄 지을 의지만
남아있을 뿐 거룩할 의지가 남아 있을 수 없다 주장한 것이다. 빈정상한 에라스무스는 이런 논쟁을 끝으로 루터와 결별을 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신학에서는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 논쟁이 유명해지게 된다.
아마 그 시대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호기심이 서서히 일기 시작한 시대였기에 에라스무스는 늘 새로운 것을 익히고 가르치는
학자입장이라 그런 주장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는 루터의 자유의지론에 더 마음이 간다.
사람이 사람의 힘으로 거룩해질 수 있다면 구원의 값은 클 수 없다. 내가 노력해서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1%만
있다고 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나 예수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은 99%만 완전한 것일 뿐 100% 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하나님은 왜 거룩할 수도 없는 인간에게 너희도 거룩하라..하셨을까?
나는 요즘 수요일 저녁마다 몇 분들과 성서연구를 하고 있는데 요즘은 마태복음을 가르친다. 매주 강의한 내용은 이곳 성서와
치유란에 올리고 있으니 모든 교안을 모두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앞부분에는 산상수훈이 나온다.
그런데 참 좋은 말씀이지만 이해되지 않는 말씀도 많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도 내밀라는 말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더 섬기라는 말씀 그리고 팔복이라 일컫는 말씀, 심령이 가난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애통하는 자..이 모든 이야기들을 가만히
보면 그 어느 것 하나 사람이 제대로 지킬 수 없는 말씀이 수두룩이다. 그런데 순간 눈이 열렸다.
즉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에게 말하셨으나 그건 예수님 자신만이
이루실 수 있는 말씀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신 말씀 그대로를 다 잘 지킨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로울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대로 살아갈 사람 하나도 없다. 불가능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 말씀 하신 그대로 본인이 행하시고 사셨다
고로 예수만 하나님 앞에 의로운 분이다. 그런데 그 의로움을 당신이 갖지 않으시고 믿는 자들에게 주신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가 마치 율법과 산상수훈의 말씀을 다 지킨 사람인 것처럼 "의롭다" 여겨주시고 인정하신다.
이것이 은혜이다. 그러니 우리들에게(구약성서에 이르신대로 하면) 너희도 거룩하라 - 는 말씀은 거꾸로 읽으면 된다.
너희도 거룩하라. 그러나 너희가 거룩해지려 할수록 거룩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를 거룩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나는 루터가 인상도 좋고 학식도 뛰어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에게 우리가 거룩해질 의지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의지가
있다면 죄 지을 의지가 남아 있다라고 말한 것이 어쩌면 너무 인간의 수준을 비하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러나 그는
인간의 본성을 바로 본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 프리즘에 비췬 일곱색깔 무지개처럼 시시각각 변화한다.
그런 변덕스러움 밑에 숨겨져 있는 인간의 의지가 있다면 그게 죄 지을 의지 뿐이라는 것이다. 누가보면 이 사람 너무 인간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루터는 가장 어둠이 짙을 적에 바로 그 다음에 빛이 비취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안 사람이다.
사도바울이 무엇이라 했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다 하지 않았나.
그가 저 바닥을 치는 절망적 인간에 대해 말하는 건 그렇게 바닥에 널부러진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현존 즉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성육(incanation)하심을 본 것이다.
다시 말하여 에라스무스는 인간이 갖고 있는 혼적인(psyche) 모습을 강조했다면 루터는 혼 밑에 있는 깊은 영적 차원의 본질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젊은 사람들은 수많은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기에 루터보다 에라스무스가 더 와 닿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이를 먹다보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수만건 반복하고 하다..어느 순간 비로소 인정한다. "내 수준이..이거구나"..참 씁쓸하지만 처절한 고백이 나온다.
그런 순간 나는 루터가 말한 것 인간에게 의지가 있다면 죄 짓는 의지가 남아있을 뿐이라 말한 게 인간을 비하한 게 아니라, 인간을
바로본 것이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비참은 자기 비하로 이어지지 않는다. 자기 비하에만 빠져 있다면 그건 신앙이 아니다.
자기를 비우는 단계 즉 자기 겸손의 단계로 들어갈 길이 비로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은혜받은 자에게 남는 건 자랑이 아니라 겸손이요 세뇌가 되어 하는 말이 아니라..정말 자랑할 건 십자가 예수 한 분 뿐이라는
마음이 절로 나온다. 그런 고백이 진실하면 신앙 즉 하나님 앞에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그 마음도 내려놓는다. 그 마음 안에 얼마나 나의 은밀한 야망이 스며있는지를 봤기 때문이다.
그 야망을 위해 돈을 모으고 건물을 세우고 조직을 만들고 사람들을 모아 열광하게 만들고 집단최면을 걸고 나는 선지자다 나는
나라 위해 순교한다는 그런 개소리를 하지 않는다 이 말이다.
나중에 심판대 앞에 서서 주둥이가 움직이기 전에 양심이 소리칠텐데 그 소리에 귀막을 수 없다면 그 순간이 지옥일 것이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말씀이 약하고 신학이 개판이며 얼마나 인격적 수준이 낮고 유치했는지 나는 요즘 우리나라 돌아가는 모습
보며 많은 걸 깨닫는다. 이런 기독교 갖고 22세기를 열고 통일한국을 열며 전세계적인 복음의 전진기지가 될 수 있겠나?
하나님이 장도리를 갖고 두드리시는 것이 느껴진다. 아프게 맞을 땐 참으며 인내하며 근본을 돌아보는 게 제일이다.
그간 너무 잘 먹고 호의호식하였다. 영성은 죽었다. 영성은 가난에서 나온다.
한국 기독교가 망하면 하나님이 새로운 기독교를 일으키실 것이다. 오직 준비된 자들만이 그 때 쓰임받게 될 것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는 더 깊기 때문이다
중세가 지나고 종교개혁의 바람이 온 유럽에 불어닥치면서 서서히 사람들의 자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교회라는 집단주의에서 나 라는 자의식의 강조가 부각되었고, 신에서 인간으로, 성경에서 그리스 고전으로, 종교에서 과학으로
서서히 그야말로 패러다음의 대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루터를 많이 도왔다. 그 중에서 에라스무스
라는 학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 두 사람은 의기투합 동지같은 삶을 살았으나 차츰 그들 사이에 의견 대립이 커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에라스무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는데 이런 말씀을 이루려면 인간의 지고지순한 노력과 헌신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루터는 인간에게는 거룩할 요소가 단 1도 없다고 주장했다.
즉 에라스무스는 인간의지의 선함을 주장했으나 루터는 그 선한 의지가 타락했기에 인간에게 있는 자유의지는 죄 지을 의지만
남아있을 뿐 거룩할 의지가 남아 있을 수 없다 주장한 것이다. 빈정상한 에라스무스는 이런 논쟁을 끝으로 루터와 결별을 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신학에서는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 논쟁이 유명해지게 된다.
아마 그 시대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호기심이 서서히 일기 시작한 시대였기에 에라스무스는 늘 새로운 것을 익히고 가르치는
학자입장이라 그런 주장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는 루터의 자유의지론에 더 마음이 간다.
사람이 사람의 힘으로 거룩해질 수 있다면 구원의 값은 클 수 없다. 내가 노력해서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1%만
있다고 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나 예수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은 99%만 완전한 것일 뿐 100% 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하나님은 왜 거룩할 수도 없는 인간에게 너희도 거룩하라..하셨을까?
나는 요즘 수요일 저녁마다 몇 분들과 성서연구를 하고 있는데 요즘은 마태복음을 가르친다. 매주 강의한 내용은 이곳 성서와
치유란에 올리고 있으니 모든 교안을 모두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앞부분에는 산상수훈이 나온다.
그런데 참 좋은 말씀이지만 이해되지 않는 말씀도 많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도 내밀라는 말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더 섬기라는 말씀 그리고 팔복이라 일컫는 말씀, 심령이 가난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애통하는 자..이 모든 이야기들을 가만히
보면 그 어느 것 하나 사람이 제대로 지킬 수 없는 말씀이 수두룩이다. 그런데 순간 눈이 열렸다.
즉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에게 말하셨으나 그건 예수님 자신만이
이루실 수 있는 말씀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신 말씀 그대로를 다 잘 지킨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로울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대로 살아갈 사람 하나도 없다. 불가능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 말씀 하신 그대로 본인이 행하시고 사셨다
고로 예수만 하나님 앞에 의로운 분이다. 그런데 그 의로움을 당신이 갖지 않으시고 믿는 자들에게 주신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가 마치 율법과 산상수훈의 말씀을 다 지킨 사람인 것처럼 "의롭다" 여겨주시고 인정하신다.
이것이 은혜이다. 그러니 우리들에게(구약성서에 이르신대로 하면) 너희도 거룩하라 - 는 말씀은 거꾸로 읽으면 된다.
너희도 거룩하라. 그러나 너희가 거룩해지려 할수록 거룩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를 거룩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나는 루터가 인상도 좋고 학식도 뛰어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에게 우리가 거룩해질 의지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의지가
있다면 죄 지을 의지가 남아 있다라고 말한 것이 어쩌면 너무 인간의 수준을 비하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러나 그는
인간의 본성을 바로 본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 프리즘에 비췬 일곱색깔 무지개처럼 시시각각 변화한다.
그런 변덕스러움 밑에 숨겨져 있는 인간의 의지가 있다면 그게 죄 지을 의지 뿐이라는 것이다. 누가보면 이 사람 너무 인간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루터는 가장 어둠이 짙을 적에 바로 그 다음에 빛이 비취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안 사람이다.
사도바울이 무엇이라 했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다 하지 않았나.
그가 저 바닥을 치는 절망적 인간에 대해 말하는 건 그렇게 바닥에 널부러진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현존 즉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성육(incanation)하심을 본 것이다.
다시 말하여 에라스무스는 인간이 갖고 있는 혼적인(psyche) 모습을 강조했다면 루터는 혼 밑에 있는 깊은 영적 차원의 본질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젊은 사람들은 수많은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기에 루터보다 에라스무스가 더 와 닿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이를 먹다보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수만건 반복하고 하다..어느 순간 비로소 인정한다. "내 수준이..이거구나"..참 씁쓸하지만 처절한 고백이 나온다.
그런 순간 나는 루터가 말한 것 인간에게 의지가 있다면 죄 짓는 의지가 남아있을 뿐이라 말한 게 인간을 비하한 게 아니라, 인간을
바로본 것이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비참은 자기 비하로 이어지지 않는다. 자기 비하에만 빠져 있다면 그건 신앙이 아니다.
자기를 비우는 단계 즉 자기 겸손의 단계로 들어갈 길이 비로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은혜받은 자에게 남는 건 자랑이 아니라 겸손이요 세뇌가 되어 하는 말이 아니라..정말 자랑할 건 십자가 예수 한 분 뿐이라는
마음이 절로 나온다. 그런 고백이 진실하면 신앙 즉 하나님 앞에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그 마음도 내려놓는다. 그 마음 안에 얼마나 나의 은밀한 야망이 스며있는지를 봤기 때문이다.
그 야망을 위해 돈을 모으고 건물을 세우고 조직을 만들고 사람들을 모아 열광하게 만들고 집단최면을 걸고 나는 선지자다 나는
나라 위해 순교한다는 그런 개소리를 하지 않는다 이 말이다.
나중에 심판대 앞에 서서 주둥이가 움직이기 전에 양심이 소리칠텐데 그 소리에 귀막을 수 없다면 그 순간이 지옥일 것이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말씀이 약하고 신학이 개판이며 얼마나 인격적 수준이 낮고 유치했는지 나는 요즘 우리나라 돌아가는 모습
보며 많은 걸 깨닫는다. 이런 기독교 갖고 22세기를 열고 통일한국을 열며 전세계적인 복음의 전진기지가 될 수 있겠나?
하나님이 장도리를 갖고 두드리시는 것이 느껴진다. 아프게 맞을 땐 참으며 인내하며 근본을 돌아보는 게 제일이다.
그간 너무 잘 먹고 호의호식하였다. 영성은 죽었다. 영성은 가난에서 나온다.
한국 기독교가 망하면 하나님이 새로운 기독교를 일으키실 것이다. 오직 준비된 자들만이 그 때 쓰임받게 될 것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는 더 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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