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규교수 블로그에서 퍼옴)
우리가 장발장이라는 소설과 영화에 감동하는 것은 미리엘 주교의 진심어린 사랑과 용서 때문이다.
장발장을 체포한 형사 앞에서 미리엘 주교의 한 마디, "장발장 이 은촛대도 주었는데 왜 가져가지 않았소"..
장발장은.. 그 순간 무너졌다.
..인생의 비극은 고통이나 재난이나 질병, 사고, 죽음이 오는 것이겠지만 더 큰 비극은 그런 비극 앞에서 진심어린 마음으로
같이 울어주고 같이 슬퍼하며 같이 마음을 위로해줄만한 1인..2인이 아니라..1인이 부재하다는 현실이다.
어차피 인생은 고통의 바다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슬프지만 아픈 현실이며 현상이다.
인터넷으로 융 수업을 하다 어느 분이 그런 질문을 주셨다. "있는 그대로 수용받는다는 개념을 담은 책을 소개해주세요"
문득 두 권의 책이 떠 올랐다. 한 권은 상담심리학을 공부할 당시 알게 된 칼 로저스 라는 인물이고. 또 다른 한 권은 신약성서 로마서다.
특히 칼 로저스와 칼 바르트 라는 신학자의 신학을 비교한 케리그마와 상담 이라는 30년 전에 나온 책을 공부하다 나는 내 삶의
한 가닥 빛이 마음에 비춰지는 체험을 했다.
칼 로저스는 유명한 상담심리학의 아버지이지만 그는 젊은 시절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 학생으로 공부한 목사 후보생이었다.
그런 그가 2학년 때 중국으로 YMCA 회원으로 방문을 하는데 그 때 엄청난 문화 충격을 받는다. 세상에 미국이나 유럽만 있는 게
아님을 절감한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중국인들이 즐겨읽는 노.장자를 보며 다시 충격을 받고 그는 신학을 포기하고 유니온 옆에
있는 콜롬비아 대학교에 입학해 교육학 및 상담학을 공부한 후에 미국인들의 종교인 기독교의 여러 개념을 심리학화 한다.
이 두 작업의 비교를 면밀히 연구한 사람이 토마스 오든이라는 학자이다. 그의 저서 중 하나가 케리그마와 상담이다.
칼 로저스와 칼 바르트의 비교는 이런 식이다. 기독교에서 "말씀(하나님)이 육신이 되어"라는 말씀이 있다. 이를 신학적으로
Incanation(化肉-화육)이라 부른다. 이 화육이라는 개념을 심리학화 시킨다면 그것이 empathy(공감)라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는데 정말 하늘이 열리는 체험을 했다(케리그마와 상담의 번역자, 지금은 은퇴하신 감리교신학대학교
실천신학 교수셨던 이기춘 교수의 강의를 듣다가 그런 경험을 하였다. 그 분의 구수하면서도 예리한 강의가 그립다).
Incanation(化肉-화육) = empathy(공감)이 무슨 말인가? 신이 이 세상에 내려오심은 세상의 눈높이로 자신을 낮추시고
세상의 수준에 자신을 공감하셨다는 것이다.
성경에 대해 잘 아는 당시 미국 교인들에게 "여러분 하나님의 Incanation(化肉-화육)은 empathy(공감)이십니다"라고 하니
졸던 사람들도 깨어 은혜를 받더라는 것이다.
그럼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인 은혜 Grace는 어떤 단어나 주제로 바뀔까? 칼 로저스 심리학으로 풀면
은혜는 무조건적 수용 혹은 배려 Unconditional positive acceptance 가 된다. 즉 은혜는 무조건적 수용이다.
조건과 제한을 두지 않으신다. 그게 은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Unconditional positive acceptance 라는 개념이 너무 좋았다.
그 말을 하는 그 자체로 내 마음이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 20대의 나는 완전주의와 강박이라는 감옥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 감옥문을 열어준 말이 바로 Unconditional positive acceptance 이었다.
장발장의 무겁고 습하고 억울하며 분노하는 마음의 빗장을 열어준 것이 바로 미리엘 주교의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바로 Unconditional positive acceptance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전에 치유하신다. 물론 구원하시고 치유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경험상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전 치유하시는데 그 치유의 시작이 바로 Unconditional positive acceptance 이다.
그런데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직접 꿈이나 사건을 통해 Unconditional positive acceptance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 장발장에게 미리엘 주교가 있듯 누군가..한 사람을 소개해 주신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그런 좋은 스승들이 많았다. 그분들이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헬렌 켈러에게 설리반 선생님이 없었더라면 헬렌 켈러는 아무도 기억을 못했을 것이다. 그와 같다.
그런데 나를 수용해 줄 수 있는 그 누군가는 왜 나를 수용해 줄 수 있었을까? 그 분들 인생에 그 한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한 명의 역사"이다. 예전에 나와 상담을 하던 한 여선생님이 상담을 망치고 떠난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녀가 한 말이 지금도 멍처럼 기억난다. "교수님은 보면 어린 시절 어머니는 아니지만 외할머니가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사랑해주신 경험이 있어 보입니다. 근데 나는 아무도 없어요. 이게 참 억울합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미..그 말 안에 나에 대한 전이감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그 당시 내 모든 조건이 그 사람을 감당하기가
너무 버거웠다. 상담이 안 좋게 끝난 경험이 거의 없었는데 안 좋게 마친 유일한 몇 사람 중 한 사람이 그 여자 선생님이다.
나는 그 선생님의 그 말과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아무도 없어요..나는 아무도..없어요..
나는 그리스도인이기에 그런 분들을 만나면 갑자기 상담자로서 전도하고 픈 욕구가 불쑥 올라온다. 내가 믿는 예수는 당신을 수용해
줄 분이세요! 라고..말이다. 그러나 순간 지금 나는 전도를 하는 게 아니라 상담을 하는 사람이기에 말을 자제한다. 그리고 순간
당황한다. 그 이유는..그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사람의 사랑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다만..그녀는 너무나 사람을 불신하기에 내면에 사람에 대해 통제하고픈 욕구가 가득하였다. 나이도 많고 상담경험이 많은 사람
이었기에 그 당시 나의 역전이 문제도 분명히 있었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그녀에 대해 기도하곤 한다.
사람은 원죄가 있다고 성서는 말씀하는데 그 원죄라는 게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이어졌지만 그 원죄가 드러난 형태는 세 가지
였다. 범죄한 아담이 하나님에게 말한 세 마디에 그 답이 있다. 하나님이 그에게 물으신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설마 신이 아담이 숨은 장소를 못 찾아 그런 질문을 하셨을까. 장소가 아니라 존재의 위치를 물으신 것이다. 이에 아담은 답한다.
벗었기에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인간이 죄 짓고 처음 느낀 감정은 죄의식이 아니라 벗었기에 즉 수치심이었다. 이 때부터 인간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누군가에게
보이지 못했다. 그러는 순간 그것은 약점 잡히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오기 힘든 것이다. 뭔가를 가리고 나온다. 가면을 쓰고 나온다. 이게 인간의 비극이며 원죄이다.
그래서 예수도 세상에 오셔서 옷 벗김을 당하고 속옷까지 빼앗긴 체 십자가에서 죽어간다. 아담도 벗었고 예수도 벗었다.
인간도 벗었고 하나님도 벗었다. 그러니 더 이상 인간만 수치스러움에 떨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 위해 피흘려주신 십자가 앞에 나아오면 우리는 거기서 치유가 일어난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나오라는 것 그거 하나다. 그게 바로 무조건적 긍정적 수용(Unconditional positive acceptance)이다. 그게 치유다.
그 치유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럴 때 신에 대한 자신만의 두려움이 사라진다. 율법의 무서움도 사라진다.
오직 수용과 기쁨과 평안만 가득하다. 더 숨을 필요가 없다. 당당히 사랑받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다룬 내용이 로마서 7-8장이다. 7장은 절망이고 8장은 희망이다. 7장은 비참이고 8장은 찬송이다.
하나님께 Unconditional positive acceptance을 당한 사람은 두려울 게 없다. 죽음도 두렵지 않다.
나는..적어도 그런 경험을 하면서 이후에 내 자아가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 그 도구로 사용된 것이 프로이트와 융 그리고
대상관계이론, 자기심리학, 애착이론 같은 분야였다. 그래서 나는 이런 강의를 듣고도 강의를 하고도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참 신기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묻고 싶다. 자기가 치유되지 않았으니 무미건조한 논리와 이론만 떠드는 것이다.
그래서 강의자나 설교자는 분명 자기가 치유된 경험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파급력이 크다.
지식 전달이 아니다. 치유의 전달이며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는 용매제 역할을 하는 게 강의자요 설교자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미리엘 같은 스승이 있는가? 설리반 같은 선생님이 있었나?
자기 실존의 극심한 고통과 해방을 성경을 통해 맛 보고 체험한 적이 있었는가? 이런 질문들이 내가 받는 고난보다 더 중요하다.
무조건적 수용, 내 존재가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수용받는 체험이 있었다면 이제 치유가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변화의 시작이고 성장의 꿈틀거림이며 삶의 억압이 풀리는 희열의 순간이다.
이 모든 새로움이 글을 보는 모든 분들에게 가득하길!
우리가 장발장이라는 소설과 영화에 감동하는 것은 미리엘 주교의 진심어린 사랑과 용서 때문이다.
장발장을 체포한 형사 앞에서 미리엘 주교의 한 마디, "장발장 이 은촛대도 주었는데 왜 가져가지 않았소"..
장발장은.. 그 순간 무너졌다.
..인생의 비극은 고통이나 재난이나 질병, 사고, 죽음이 오는 것이겠지만 더 큰 비극은 그런 비극 앞에서 진심어린 마음으로
같이 울어주고 같이 슬퍼하며 같이 마음을 위로해줄만한 1인..2인이 아니라..1인이 부재하다는 현실이다.
어차피 인생은 고통의 바다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슬프지만 아픈 현실이며 현상이다.
인터넷으로 융 수업을 하다 어느 분이 그런 질문을 주셨다. "있는 그대로 수용받는다는 개념을 담은 책을 소개해주세요"
문득 두 권의 책이 떠 올랐다. 한 권은 상담심리학을 공부할 당시 알게 된 칼 로저스 라는 인물이고. 또 다른 한 권은 신약성서 로마서다.
특히 칼 로저스와 칼 바르트 라는 신학자의 신학을 비교한 케리그마와 상담 이라는 30년 전에 나온 책을 공부하다 나는 내 삶의
한 가닥 빛이 마음에 비춰지는 체험을 했다.
칼 로저스는 유명한 상담심리학의 아버지이지만 그는 젊은 시절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 학생으로 공부한 목사 후보생이었다.
그런 그가 2학년 때 중국으로 YMCA 회원으로 방문을 하는데 그 때 엄청난 문화 충격을 받는다. 세상에 미국이나 유럽만 있는 게
아님을 절감한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중국인들이 즐겨읽는 노.장자를 보며 다시 충격을 받고 그는 신학을 포기하고 유니온 옆에
있는 콜롬비아 대학교에 입학해 교육학 및 상담학을 공부한 후에 미국인들의 종교인 기독교의 여러 개념을 심리학화 한다.
이 두 작업의 비교를 면밀히 연구한 사람이 토마스 오든이라는 학자이다. 그의 저서 중 하나가 케리그마와 상담이다.
칼 로저스와 칼 바르트의 비교는 이런 식이다. 기독교에서 "말씀(하나님)이 육신이 되어"라는 말씀이 있다. 이를 신학적으로
Incanation(化肉-화육)이라 부른다. 이 화육이라는 개념을 심리학화 시킨다면 그것이 empathy(공감)라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는데 정말 하늘이 열리는 체험을 했다(케리그마와 상담의 번역자, 지금은 은퇴하신 감리교신학대학교
실천신학 교수셨던 이기춘 교수의 강의를 듣다가 그런 경험을 하였다. 그 분의 구수하면서도 예리한 강의가 그립다).
Incanation(化肉-화육) = empathy(공감)이 무슨 말인가? 신이 이 세상에 내려오심은 세상의 눈높이로 자신을 낮추시고
세상의 수준에 자신을 공감하셨다는 것이다.
성경에 대해 잘 아는 당시 미국 교인들에게 "여러분 하나님의 Incanation(化肉-화육)은 empathy(공감)이십니다"라고 하니
졸던 사람들도 깨어 은혜를 받더라는 것이다.
그럼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인 은혜 Grace는 어떤 단어나 주제로 바뀔까? 칼 로저스 심리학으로 풀면
은혜는 무조건적 수용 혹은 배려 Unconditional positive acceptance 가 된다. 즉 은혜는 무조건적 수용이다.
조건과 제한을 두지 않으신다. 그게 은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Unconditional positive acceptance 라는 개념이 너무 좋았다.
그 말을 하는 그 자체로 내 마음이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 20대의 나는 완전주의와 강박이라는 감옥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 감옥문을 열어준 말이 바로 Unconditional positive acceptance 이었다.
장발장의 무겁고 습하고 억울하며 분노하는 마음의 빗장을 열어준 것이 바로 미리엘 주교의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바로 Unconditional positive acceptance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전에 치유하신다. 물론 구원하시고 치유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경험상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전 치유하시는데 그 치유의 시작이 바로 Unconditional positive acceptance 이다.
그런데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직접 꿈이나 사건을 통해 Unconditional positive acceptance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 장발장에게 미리엘 주교가 있듯 누군가..한 사람을 소개해 주신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그런 좋은 스승들이 많았다. 그분들이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헬렌 켈러에게 설리반 선생님이 없었더라면 헬렌 켈러는 아무도 기억을 못했을 것이다. 그와 같다.
그런데 나를 수용해 줄 수 있는 그 누군가는 왜 나를 수용해 줄 수 있었을까? 그 분들 인생에 그 한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한 명의 역사"이다. 예전에 나와 상담을 하던 한 여선생님이 상담을 망치고 떠난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녀가 한 말이 지금도 멍처럼 기억난다. "교수님은 보면 어린 시절 어머니는 아니지만 외할머니가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사랑해주신 경험이 있어 보입니다. 근데 나는 아무도 없어요. 이게 참 억울합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미..그 말 안에 나에 대한 전이감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그 당시 내 모든 조건이 그 사람을 감당하기가
너무 버거웠다. 상담이 안 좋게 끝난 경험이 거의 없었는데 안 좋게 마친 유일한 몇 사람 중 한 사람이 그 여자 선생님이다.
나는 그 선생님의 그 말과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아무도 없어요..나는 아무도..없어요..
나는 그리스도인이기에 그런 분들을 만나면 갑자기 상담자로서 전도하고 픈 욕구가 불쑥 올라온다. 내가 믿는 예수는 당신을 수용해
줄 분이세요! 라고..말이다. 그러나 순간 지금 나는 전도를 하는 게 아니라 상담을 하는 사람이기에 말을 자제한다. 그리고 순간
당황한다. 그 이유는..그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사람의 사랑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다만..그녀는 너무나 사람을 불신하기에 내면에 사람에 대해 통제하고픈 욕구가 가득하였다. 나이도 많고 상담경험이 많은 사람
이었기에 그 당시 나의 역전이 문제도 분명히 있었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그녀에 대해 기도하곤 한다.
사람은 원죄가 있다고 성서는 말씀하는데 그 원죄라는 게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이어졌지만 그 원죄가 드러난 형태는 세 가지
였다. 범죄한 아담이 하나님에게 말한 세 마디에 그 답이 있다. 하나님이 그에게 물으신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설마 신이 아담이 숨은 장소를 못 찾아 그런 질문을 하셨을까. 장소가 아니라 존재의 위치를 물으신 것이다. 이에 아담은 답한다.
벗었기에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인간이 죄 짓고 처음 느낀 감정은 죄의식이 아니라 벗었기에 즉 수치심이었다. 이 때부터 인간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누군가에게
보이지 못했다. 그러는 순간 그것은 약점 잡히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오기 힘든 것이다. 뭔가를 가리고 나온다. 가면을 쓰고 나온다. 이게 인간의 비극이며 원죄이다.
그래서 예수도 세상에 오셔서 옷 벗김을 당하고 속옷까지 빼앗긴 체 십자가에서 죽어간다. 아담도 벗었고 예수도 벗었다.
인간도 벗었고 하나님도 벗었다. 그러니 더 이상 인간만 수치스러움에 떨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 위해 피흘려주신 십자가 앞에 나아오면 우리는 거기서 치유가 일어난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나오라는 것 그거 하나다. 그게 바로 무조건적 긍정적 수용(Unconditional positive acceptance)이다. 그게 치유다.
그 치유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럴 때 신에 대한 자신만의 두려움이 사라진다. 율법의 무서움도 사라진다.
오직 수용과 기쁨과 평안만 가득하다. 더 숨을 필요가 없다. 당당히 사랑받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다룬 내용이 로마서 7-8장이다. 7장은 절망이고 8장은 희망이다. 7장은 비참이고 8장은 찬송이다.
하나님께 Unconditional positive acceptance을 당한 사람은 두려울 게 없다. 죽음도 두렵지 않다.
나는..적어도 그런 경험을 하면서 이후에 내 자아가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 그 도구로 사용된 것이 프로이트와 융 그리고
대상관계이론, 자기심리학, 애착이론 같은 분야였다. 그래서 나는 이런 강의를 듣고도 강의를 하고도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참 신기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묻고 싶다. 자기가 치유되지 않았으니 무미건조한 논리와 이론만 떠드는 것이다.
그래서 강의자나 설교자는 분명 자기가 치유된 경험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파급력이 크다.
지식 전달이 아니다. 치유의 전달이며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는 용매제 역할을 하는 게 강의자요 설교자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미리엘 같은 스승이 있는가? 설리반 같은 선생님이 있었나?
자기 실존의 극심한 고통과 해방을 성경을 통해 맛 보고 체험한 적이 있었는가? 이런 질문들이 내가 받는 고난보다 더 중요하다.
무조건적 수용, 내 존재가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수용받는 체험이 있었다면 이제 치유가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변화의 시작이고 성장의 꿈틀거림이며 삶의 억압이 풀리는 희열의 순간이다.
이 모든 새로움이 글을 보는 모든 분들에게 가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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