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

부부의 묵은 정인가?

728x90

산등성이                      

 

                                                                                                             고영민

 

 

팔순의 부모님이

또 부부싸움을 한다.

 

발단이 어찌됐든 한밤중,

아버지는 장롱에서

가끔 대소사가 있을 때

차려입던 양복을 꺼내 입는다.

 

내 저 답답한 할망구랑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죄 없는 방문만

걷어차고 나간다.

 

나는 아버지께 매달려

나가시더라도 날이 밝은

내일 아침에 나가시라 달랜다.

 

대문을 밀치고

걸어나가는 칠흑의 어둠 속,

버스가 이미 끊긴

시골마을의 한밤,

아버지는 이참에

아예 단단히 갈라서겠노라

큰소리다.

 

나는 싸늘히

등돌리고 앉아 있는

늙은 어머니를 다독여

좀 잡으시라고 하니,

그냥 둬라,

내가 열일곱에 시집와서

팔십 평생 네 아버지

집 나간다고 큰소리치고는

저기 저 등성이를

넘는 것을 못봤다.

 

어둠 속 한참을 쫓아 내달린다.

저만치 보이는

구부정한 아버지의 뒷모습,

잰걸음을 따라

나도 가만히 걷는다.

 

기세가 천 리를 갈 듯 하다.

드디어 산등성,

고요하게 잠든 숲의 정적과

뒤척이는 새들의 혼곤한 잠속,

순간 아버지가

걷던 걸음을 멈추더니

집 쪽을 향해 소리를 치신다.

 

에이, 이 못된 할망구야,

서방이 나간다면

잡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이 못된 할망구야,

평생을 뜯어먹어도

시원찮을 이 할망구,

뒤돌아 씩씩거리며 아버지는

집으로 천릿길을 내닫는다.

 

지그시 웃음을 물고

나는 아버지를 몰고 온다.

 

어머니가 켜놓은

대문 앞 전등불이 환하다.

 

아버지는 왜, 팔십 평생

저 낮은 산등성이

하나를 채 넘지 못할까.

아들이 묻는다.

아버지는 왜 저

산등성이 하나 못 넘느냐고.

 

아버지가 답한다.

가장이 산등성이를 넘어가면

안 되는 거라고.

 

딸이 묻는다.

왜 엄마는 대문 앞까지

전등불을 켜놓느냐고.

 

어머니가 답한다.

남정네가 대문을 나가면

그 순간부터

기다려야 하는 거라고.

 

아들 딸이 묻는다.

그럴 걸 왜 싸우느냐고.

 

부모가 답한다.

물을 걸 물어보라고!! 

 

 

- 시집 '악어'(2015)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리에 비내리듯...  (0) 2018.05.06
들꽃 언덕에서   (0) 2018.04.15
선운사 동백꽃  (0) 2018.02.24
눈 내리는 벌판에서  (0) 2018.01.20
갈대  (0) 2018.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