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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선택과 의지로서의 인간

[변상규교수의 열린 연구실]https://blog.naver.com/jesusbyun/221634328247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은 누구나 가능성으로서 갖고 태어나지만 그것이 발현되는 것은 출생 이후 돌보는 이들의 수고가 있어야 한다.

 

농부 그림이 보인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려야 그 씨가 자라 싹이 나 열매를 맺듯, 사람도 그렇다.

 

칭찬과 격려로 미숙덩어리 인간아이를 지속적으로 기르면 아이도 그것을 학습하여 자기 스스로를 그렇게 칭찬해주고 격려한다.

 

그것이 습관이 될 적에 성격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모나 돌보는 대상이 말이 없거나 얼굴에는 별로 표정이 없거나 마음의 병이 있어서 아이를 오롯이 기를 능력이

 

너무 부족하거나 우울하거나 분노중독이거나 충동적이거나..이러면..아이도 그걸 그대로 학습하게 되어 건강하게 선택할 수도 있는

 

일들을 이상한 것을 선택하여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이게 불행이고 슬픈 운명이 되는 것이다.

 

믿든 아니믿든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자유의지 라는 것을 주셨다.

 

이게 문제다. 신은 완벽하시기에 자유의지를 통제하는 능력이 있으셨겠지만 흙덩어리로 지음받은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부여되었다 해도 경험이 없으니, 시행착오가 없으니 오류의 가능성은 차고 넘치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선고하셨다!"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유의지 자체가 인간에게는 좋은 선물 같아 보여도 인간을 스스로 심판하는 선고와 같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너무 자유의지를 선물이 아닌 선고라는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다.

 

신이 주신 자유의지는 분명 최고의 선물이었다.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빚으시고 그 인간에게 신만이 갖는 자유의지를 주셨으니 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가. 인간은 그 자유의지를 갖고 자신과 운명과 이웃과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이다.

 

문제는..자신은 별볼일 없는 인간이라 선택하는 마음이다. 그럼 그 때부터 정말 별 볼 일 없는 선택을 한다.

 

그렇게 되면 내가 나이지만 인간 자체가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능력이 있다보니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는 능력을 갖고 있는데

그 능력으로 자신을 그렇게 평가하게 된다. "너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야" 이건 마치..하드웨어에 너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야 라고 입력하는 것과 같다.

 

이후 그 컴퓨터는 별 볼 일 없는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기 시작한다. 별 볼 일 없는 친구(친구를 경제적 쓸모있음의 기준으로 나눈다는 의미가 아니다. 말 그대로 내 인생에 너무 도움이 안 되는 그런 류의 친구를 의미한다)와 별 볼 일 없는 행동을 한다.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결과를 맞이한다. 그리고 그게 숙명이려니 운명이려니 하며 다시 체념하고 별 볼 일 없는 삶을 반복하다..죽는다.

 

이게 얼마나 황당한 결과겠는가..얼마나..불교로 말하자면 수 억 겁년의 윤회를 반복하여 태어난 인간의 삶인데 그런 삶을 그렇게 낭비하다

 

죽는다니..로또 1등 당첨된 거 모르고 동네 하수구에 버렸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인간에게 주신 선택과 의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런 능력을 부여하신 하나님 마저도 인간들이 그 의지를 자기를 찬양하는 것에 사용하지 않고 바벨탑을 짓는 걸 보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 창세기 11장

 

이미 노아의 홍수로 쓸어버리셨기에 하나님의 탄식은 더욱 더 깊다.

 

그러나 위 내용을 자세히 보라. 신도 인생이 하는 일을 막을 수 없다는 탄식 아닌가.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신이 세상에 멸망주시지 않아도 인간들이 지구 온난화에 쓰레기에 폐기물에..핵폭탄에..이렇게 하면 지구는 신이 멸망시키지 않아도 멸망하게 된다. 엘론 머스크가 아무리 화성에 우주기지 만들어도 거기도 동일하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자신의 자유의지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유의지는 단 하나. 자신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만드는 자유의지다.

 

절제하고 하지 않고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 말이다. 그걸 어기면 인간도 멸종된다는 각오를 하고 말이다.

 

 

이 글 보는 여러분들이..자기 자신을 우습게 별 볼 일 없게 여기지 않길 바란다.

 

여러분들이 선택하는 선택과 의지는 자신과 이웃과 세상과 운명을 바꿀만한 그런 의지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정말 제일 해로운 건 의지의 절망이다. 물론 오죽했음 의지의 절망이 오겠나마는 그래도 그 의지를 자꾸 절망으로

 

기울이지 않길 바란다. 이런 항변이 있으리라. "누가 그러구싶어 그런가요? 내 환경이 나를 그렇게 자꾸 만드는데 어쩌라구요!!"

 

맞다. 그래도 멀리 바라보자. 그럼 정말 의지의 절망만큼 악한 건 없으리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오바마가 미국 대통이었을 때) 그런 글을 읽었다.

 

구글 영어로 오바마를 죽이자 그렇게 몇 번 했더니 얼마 되지 않아 CIA가 찾아왔다는.

 

뭔지 모르지만 필터링이 있어 그런 메시지를 검색하는 자들은 모두 다 요주의 인물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의 의지는 그렇게 구글에 몇 글자 치는 일로 테러범이 되기도 하고, 다른 인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살면서 자기의 의지와 선택을 100% 극대화할 수 있다면 그는 분명 원하는 걸 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운전면허 시험을 치는데 "내가..잘 할 수 있을까? 실수하면 어쩌지..ㅠㅠ.." 이런 마음 갖고 사는 사람과 "안되도 해봐야지. 하면 되지 까짓!"

 

이런 마음 갖고 운전면허 시험치는 사람과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 글이..그러니까 긍정적 마인드 갖고 살자는 말이죠! 이런 말을 하려고 쓴 건 아니다.

 

그런 차원을 넘어선다. 인간의 선택능력과 의지(will)의 능력은 엄청난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오늘만이라도 스스로를 귀히 여기고 오늘만은 좋은 걸 먹고, 좋은 걸 보고, 좋은 휴식을 갖고,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사람을 만나 늘 자주 쓰듯 "소확행"을 누리길 바란다.

 

무기력과 절망이 가장 나쁜 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말이다. 이런 글을 읽고도 다시 "응 이런 이야기였구나" 그러면서 다시 절망을 학습하지 않길 바란다. 자존심이 몹시 상해 그럴 수 있지만..계속 그리 살면 정말 자존심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는 바닥인생이 된다.

 

누가 그러라 시킨 것도 아닌데..그런 이들에게..사르트르의 말은 예언과 같다. 자유의지는 내 인생의 선고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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