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생활고와 피아노
우리집은 수입원이 없어졌다
아버지 한분의 월급에 의존해
살아왔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돈 한푼 들어올 데가 없었다.
이런 경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농토가 남을테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가게가 남아 있어서
그래도 생업을 이어갈수 있을텐데
도시의 월급장이 가장을 둔집은
생업이 끊겨버리니 막막하기만했다.
엄마는 당장 뭐먹고 살아야 하나하며
한숨을 땅이 꺼지도록 쉬셨다.
1년전 1년밖에 못사신다는
시한부생명 선고를 받으셨지만
우린 믿고 싶지 않았었다.
사실 그 시절엔 집안에 암환자가
있으면 대개 빚더미에 앉곤 했었다.
치료비가 엄청났었기 때문에....
그러나 아버지는 1년간
당신이 암환자인지 모른채
경제활동을 계속 하셨다.
그래서 그나마 불행중 다행으로
아버지는 빚은 안남기셨다
집한채는 남기고 가셨다.
요즘은 환자에게 병명을 숨기지 않고
말하는 분위기지만 그땐 환자에게
병명을 숨기는게 대세였다.
우리는 아버지께 수명이 1년밖에
안남은 시한부생명의 암에 걸리셨다는
말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아셨다면
아버지는 우리 어린 4남매를 두고
가셔야한다는 생각에 견디지 못하셨을거 같다.
아버지는 더군다나 북에 어린자녀를 두고
월남을 하신 분이라서 늘 북에 두고온 아이들이
눈에 밟힌다며 사무치게 그리워 하셨던 분이다.
아버지 유품중에 남에게 돈을
빌려준 장부가 있었다.어음들도
있었고...
엄마는 그걸 들고 빚을
받으러 다니셨는데 대부분
그런 일 없다면서 외면 하더란다
엄마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실망도 하지 않고 빚 받는걸
쉽게 체념 하셨다.
난 그런 어른들의 세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 이야기로는 그시절 다 어렵게
살아서 되도록 빚을 안갚을 수 있으면
갚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증거도 없어졌겠다 안갚는다는 것이었다.
특히 아버지가 착해서 나쁜 사람들이
아버지를 이용한 것이라고도 하시고...
엄마는 그시대 엄마들이 다 그랬듯
전업주부였고 돈버는 일은 해본적이 없었다.
아이들은 대학교 2학년인 나를 비롯해서
고등학생.중학생,초등생막내까지 줄줄이 있었다.
아버지는 이런 어린 자식들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
엄마는 우선 손쉽게 돈되는 세간살이를
팔아서 돈을 마련 하셨다.
전화,텔레비젼,피아노가 희생물이 되었다.
피아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석달전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주신 것이었었다.
엄마도 모르셨는데 갑자기 피아노가
집안에 들어오더란다.
얼떨결에 피아노를 들이고 아버지께
전화를 하니 탁상일기에 메모해놓은게
있으니 읽어보라고 하시더란다.
메모에는
"내가 아파서 수술하고 병중에 있을 때
잘 보살펴준 가족들에게 고마워서
피아노를 선물합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철없는 우리는 좋아라하고
엄마는 질겁을 하셨다.
엄마는 의사의 말을 마음에 두고
계셨던 것이다.
의사말대로라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난 성당에서나 집에서
우리 아버지에게 기적을 베풀어달라고
기도했기에 아버지에게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피아노는 내가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것이라는 걸 아버지는 알고 계셨다.
아버지는 내가 성적이 좋을때면
내게 무얼 갖고싶냐고
물으셨는데 난 그때마다 피아노라고
말하곤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피아노를 사 주신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와 피아노와의 인연은 그렇게
몇달만에 끝나버렸다.
몇달만에 반값으로 처분됐다.
그땐 피아노를 팔아버린 엄마가 무척
원망스러웠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선물인데
어떻게 그렇게 망설임없이 팔 수가 있냐고...
대학졸업후 내가 돈을 벌자마자 여동생의
부탁으로 피아노를 샀었다
그 피아노로 여동생은 피아노레슨을 했고
여동생이 결혼하면서 그 피아노를 가져가서
계속 피아노레슨을 했다.
엄마와 여동생은 그게 못내 미안했는지우리 딸이
12살 되던해 우리에게 피아노를 선물했다.
그 피아노는 우리 딸이 가장 사랑하는
물건이 되었다...
딸은 스트레스를 피아노연주로 풀곤 했었다.
다시 생활고로 돌아가서...
그래도 그시절엔 피아노나 전화나
텔레비젼이 꽤 비싸서
어느정도 돈이 되긴했다.
엄마는 더이상 팔 물건이 없게 되자
그 다음엔 방을 세 놓았다.
우리집에는 엄마아버지가 쓰시던 안방.
여동생과 내가 같이 쓰던 딸들방
그리고 두남동생이 쓰던 아들들방
딱 방세칸이었는데
우리방을 세놓으셨다.
난 여동생과 함께 엄마 혼자 쓰시는
안방으로 들어가고...
그리고 나는 알바를 두세개씩 뛰었다
가정교사로...
엄마는 내가 학교를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보길 바라셨다
나도 그 고민을 많이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생각해보았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 들어간걸
무척 기뻐하셨었다.
1년전 수술 하시고 병실에
계실 때 내 합격소식을 들으시고
매우 기뻐하셨던 걸 잊을 수가 없었다.
현실적으로는 엄마 말씀이 맞았다.
그러나 내가 고집을 부려서
내가 알바를 좀 빡세게 하고
대학은 마치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왜냐면 그땐 5급(지금9급)공무원
봉급이 워낙 적었기 때문에
알바 빡쎄게 하는거나 그게 그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만해도
가난이 무엇인지 몰라서 철없이
내린 결론이었던 것같다.
그러나 그 시절엔 우리학교에는
나보다 더 가난한 애들도 정말 많았었다.
우린 술담배도 안하시고 가정밖에
모르는 근면성실한 아버지 덕에
편하게 살아왔던 것이라는 걸
그제사 깨달았다.
어린시절 내 기억에 가난해서
밥을 굶거나 학교 준비물을
못가져 갔거나 수업료를
못내 본적은 없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도
엄마의 악착같은 노력으로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닥쳐온 가난이라는 상황에
적응하기가 정말 힘들었었다.
우린 아버지가 남기신 집한채는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살았었다.그때는....
엄마도 해보지 않던 온갖 고생을 다하셨다.
엄마는 아버지와 산 20년간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그시절 다른 아버지들과는
달리 매우 가정적이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울엄마를 엄청 부러워했었다.
아버진 퇴근 하시면 곧장 집으로
오셔서 주로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하시곤했다
청소를 하시거나 내 어린 동생들을
등에 업고 다니시는걸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다.
우리친구들과 베드민턴도 쳐주시고
놀아주셨다
그래서 우리집은 언제나 우리 남매들
친구들로 북적거리곤했다.
친구들이 우리집하면 스윗트홈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고 했었다.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