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된 삶

성서는 분해하라고 준 선물이 아니다

sugee 2021. 5. 25. 16:51
[변상규교수 블로그에서 ]
나는 상식을 존중하지만 상식을 믿지 않는다. 불신한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상식을 넘어선 진리를 믿는다.

인생이란 상식에서 진리로 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남들이 하는 말 속에는 상식이 많다.

그러나 그런 말들로 내가 구원받을 수는 없다. 구원이 인생에 필요한가 묻는 자도 있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나같은 사람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다. 도저히 부모로부터 얻은 목숨만 갖고는 이 답답한 현실을 어찌할 수 없다.

목숨은 늘 죽음을 전제한다. 그래서 나는 죽음의 전제가 없는 생명을 바란다. 그 생명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는다.

그런데 하나님은 생명을 달라하니 예수를 주신다. 생명이라는 추상적 선물대신 예수라는 놀랍고 신비한 인격을 소개해 주신다. 그래서 예수가 신비요 생명이며 구원임을 믿고 받아들인다.

성자의 글 속에는 교훈이 있지만 예수의 말 속에는 생명이 있다. 성자의 글은 시간 속에 있지만 예수의 말은 영원 속에 있다. 오래 전 아마 구한말 이전,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기가 울 때 "호랑이가 온다" 하면 아기가 울음을 뚝

그쳤다 한다. 우리 삶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예수"만 생각하면 모든 고통이 뚝 그치게 될 것이다. 잠시라도.

그런 예수 이야기 담긴 문서가 성서이다. 성서는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러브 레터다.

그러나, 그 사랑에 대해 느낀 적 없는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갖고 이 성서가 무슨 거짓된 문서인 것처럼
이리저리 보다 결국에는 쓰레기같은 고대 문서라고 주장한다. 원래 성서는 그렇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자에게 열려진 문서이지 그런 마음 없는 자들에게는 읽어도 알 수 없는 문자이다.

내가 00을 사랑한다면 그녀가 나에게 보내온 편지 한 글자 한 글자가 귀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녀를 모르는 누군가가 그 편지를 본다면 아마 조롱거리로 전락할지도 모르겠다. 성서는 그런 것이다.

성삼위 하나님이 내 구원의 근원이라고 믿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다른 대안을 하나님 삼는다. 분명한 건 그게 내 영혼까지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죄로 죽을 뿐이라는 인과성에 매이게 될 것이다.

영혼이 애초에 없는데 무슨 영혼이냐 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부모가 돌아가시면 정말 그것으로 부모의 모든 건 끝일까? 아니면 죽은 건 몸 뿐 역치를 통해 부모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살고 계신 것일까?

지적 능력 부족한 원시인들도 죽음에 대해서만큼은 어딘가 멀리 여행을 간다고 믿었다. 과학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들은 이런 말도 동화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어린시절 동화 한편의 추억이 없다면 그 사람의 정서가 과연 정상일까? 나는 성서를 동화로 믿는 건 아니지만 동화 속에서 느낀 아름다운 정서가 스며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일방적으로 내가 예수를 믿어드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예수께서 나를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다. 영원까지 말이다. 그렇게 말하신 이가 없다. 나는 다른 성현들의 말씀을 보고 감동받고 교훈받고 깨닫기도 하지만 그들 누구도 영원을 책임져 주신다는 말이 없기에 거기까지가 그 분들의 한계라 본다.

그 한계를 넘어선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의 빛과 생명을 본다. 그렇다고 다른 성현들을 무시하거나 모독하지 않는다. 그 분들은 내가 평생을 다해도 다함이 없는 인류의 스승이니 말이다.

그러나 인류의 스승과 인류의 구원자는 다르다. 여기서 믿음이 필요하다. 그런게 어디 있느냐? 하는 자에게 예수는

무의미한다. 예수를 고등 사기꾼이라 하는 자도 있다.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보이는 법.

그러나 나같은 사람에게 예수는 그 자체로 귀하고 고맙고 의미 충만한 분이다. 어제 밤도 자기 전에 그 분이 해 주신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는 말씀을 몇 번이나 읊조리며 잠들었다. 어제 밤 생각의 무게가 너무 커져 나도 모르게 불면의 원인이 되고 그 무게에 짓눌려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그래서 말씀을 외워 그 분의 약속을 받아들였다.

그간 인간이 안되고 인격이 덜된 자들이 기독교인,목사라 하여 그간 얼마나 사회적 지탄이 대상이 되었는가.

그러나 성서는 분명 불가운데 통과하는 불시험이 성도에게도 있다고 하셨으니 그 불가운데를 통과해도 뭔가 남아있는 건 오직 진실과 금같은 믿음 뿐이라고 본다. 모든 거짓과 사기와 위선은 다 불태워질 것이다.

그러기 전 우리는 세상에서 살 적에 좀 더 성숙한 삶, 좀 더 이기성을 내다버리는 삶, 좀 더 자기 내면을 성찰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금 손해보는 듯 살고, 조금 더 베풀며 살고, 귀찮아도 조금 더 응답해주고 살면 그 좋음이

인과관계가 되어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그러니 예수를 바라보자. 그리고 그 예수를 소중히 여기자. 그 예수가 내 삶의 친구요 애인이 되도록 하자.

그래서 무인도에 갇혀 살아도 그 예수때문에 덜 외롭고 덜 괴로운 삶이 되도록 힘쓰자.

성서를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문장을 읽어도 깨닫고 은혜를 받아 오늘 하루의 삶을 움직이는 힘으로 삼자.

성서는 분해하고 비난하라고 주신 문서가 아니다. 읽고 겸손히 받들어 살라는 말씀이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어디를 봐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느껴질 때 우리는 제대로 성서를 보는 눈이 열린

것이다. 그게 열릴 때 그 분이 영광스러운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다. 나는 그게 기독교 신비주의의 핵심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